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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 사과, 당일 퇴진' 시민 무서운 기업 총수 일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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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이 지난달 1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인근에서 총수 퇴진 등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이 지난달 1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인근에서 총수 퇴진 등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기업 총수 일가의 사과가 확 빨라졌다. 27일 폭언 녹음파일이 공개된 대웅제약 윤재승 회장은 당일 사과를 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달 초 마약 밀반입 혐의로 구속된 SPC그룹 허희수 부사장도 사건이 보도된 직후 사과문을 내고 경영에서 영구적으로 배제됐다.

과거 논란을 일으켰던 총수 일가들이 사과를 한 뒤 여론 추이를 지켜보며 ‘버티기’에 들어갔던 것과 대조된다. 실제 '땅콩회항' '물벼락 갑질' 논란으로 도마에 올랐던 한진그룹 조현아·조현민 자매는 사건이 불거진 뒤 일주일이 넘어서야 여론에 떠밀려 경영 퇴진 의사를 밝혔다.

직원들에게 폭언을 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윤재승 대웅제약 회장. [중앙포토]

직원들에게 폭언을 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윤재승 대웅제약 회장. [중앙포토]

시민들, 기업 갑질에 직접 청원·고발 

전문가들은 이같은 ‘당일 사과, 당일 퇴진’이 기업 갑질 논란 등에 대한 시민, 직원들의 적극 대응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예전엔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 비판 댓글을 달던 수준에 그쳤다면, 이제는 직접 고발을 하거나, 청와대에 청원을 올리는 등 기업에 실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응에 나선다는 것이다.

백기복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는 "오너 갑질에 대한 시민과 직원들의 태도가 달라졌고 이를 학습한 기업들의 행동도 덩달아 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갑질 논란 대응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여론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튈 수 있다"며 "대웅제약과 SPC그룹이 한진그룹 사태에서 교훈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에선 특정 기업의 갑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처분을 요구하는 국민 청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최근 차량 화재 논란을 일으켰던 BMW를 직접 고발한 피해자 모임 대표 이광덕(28)씨는 "BMW의 태도가 너무 답답하고 억울해 피해자들을 모아 직접 고발을 했다"고 전했다.

BMW 피해자 모임 대표 이광덕씨가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차량 화재 원인 진상규명을 위한 5가지 요구사항을 정부에 요청했다. [뉴스1]

BMW 피해자 모임 대표 이광덕씨가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차량 화재 원인 진상규명을 위한 5가지 요구사항을 정부에 요청했다. [뉴스1]

회사 문제 직접 폭로하는 사원들 

‘익명 공간’에서 회사의 문제를 직접 폭로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유명 제약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박모(32)씨는 회사에서 문제가 되는 상사의 발언을 듣거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면 직장인 전용 익명 앱인 블라인드에 올리고 반응을 살핀다.

박씨는 "매일 가슴 속에 '칼'을 품고 회사를 다니는 직원들이 많다. 대웅제약 회장의 폭언 논란을 보며 그저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같은 상황은 기업에겐 새로운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고소, 고발이나 청와대 청원은 수사 기관이 해당 기업의 전방위 수사하는 명분을 제공하기도 한다. 실제 조현민 전 진에어 전무의 '물벼락 갑질' 논란 후 이어진 시민단체들의 고발은 한진그룹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적 수사로 이어졌다.

독일 BMW 본사 및 한국 임원 7명을 자동차 결함 은폐·축소 혐의 등으로 고발한 박순장 소비자주권회의 감시팀장은 "기업과 정부의 몇 걸음 늦은 대응에 만족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직접 행동하는 일이 늘어날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적 책임 강조 분위기 형성될 것" 

이같은 기업의 사과 및 경영 배제 등 대응을 놓고 '꼬리 자르기'식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준영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오너들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순간의 어려움을 모면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물벼락 갑질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지난 5월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강서경찰서에 출석하는 모습. 장진영 기자

물벼락 갑질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지난 5월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강서경찰서에 출석하는 모습. 장진영 기자

반면 경영자들에 대한 엄정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라는 긍정적 반응도 있다.

백기복 교수는 "갑질 논란 등은 주가에 영향을 주는 등 기업에 미치는 파장이 크기 때문에 이제 큰 논란을 일으킨 경영자가 자리를 보전하긴 어려운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윤태곤 정치컨설턴트도 "논란을 일으킨 기업의 ‘불확실성’이 과거보다 훨씬 커진 것"이라며 "시민들의 ‘직접 대응’이 기업의 태도를 바꾸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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