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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중국 3세대 지도부 어떤 삶 살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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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장쩌민(江澤民) 중국 전 국가주석이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사임하면서 중국의 3세대 지도부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을 제외하고 모두 정치무대에서 물러났다. 은퇴한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장쩌민 전 주석

중국 언론에 따르면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었던 서열 1위 장쩌민은 그의 정치적 고향인 상하이로 내려갔다. 장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이전 상하이의 시장과 시 당위원회 서기를 지냈었다. 장은 지난달 6일 그의 모교인 상하이 교통대학 개교 110주년 기념행사에서 얼굴을 보였다. 모교에 대한 장의 애정은 베이징 정가로 진출한 뒤에도 11차례나 학교를 찾았을 만큼 각별하다.

2005년 출판된 장의 전기에선 강단에 서고 싶어하는 바람을 적고 있다.

"전통적으로 퇴임한 국가 지도자들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임위원회의 부위원장이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의 부주석 자리로 옮기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관행을 뒤집고 싶어 했다. 그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는 게 꿈이었다"('장쩌민 전기' 작가 로버트 로렌스 쿤)

2004년 10월엔 장은 그의 대학 동기인 쉬리(徐力)교수에게 "은퇴 이후엔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싶어. 지금 그 준비를 하고 있다네"라고 말했다. 전기를 쓴 쿤은 퇴임 이후 장이"나는 이제 공직자가 아니다. 일신이 가볍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해말 쉬 교수는 장의 집을 방문하게 됐다. 장은 "그러잖아도 교수님이 온다길래 당대(唐代)의 시인 한유(韓愈)의 산문 '사설(師說)'을 읽고 있었다네. 우리 스승의 도에 대해 얘기해 볼까"라고 말했다고 쉬 교수는 전했다.

쉬 교수의 부인은 당시 장이 검은 양복과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손님용으로 꾸민 서가 옆 작은방에서 환담을 나눴다. 방에는 소파와 다기 세트, 작은 테이블만 있는 등 비교적 검소하게 꾸며졌다. 테이블에는 고서적 몇권이 쌓여 있었다. 세 시간 동안 대화가 이어진 자리에서 장은 천안문 사태 수습을 책임진 공산당 총서기로 부임하던 당시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았다.

"혼자 짐을 들고 베이징에 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중형차 한 대를 어디선가 구해 그걸 타고 갔지. 13년을 그곳에서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그날 만남은 요리 셋과 탕 한가지로 이뤄진 간단한 식사와 함께 끝났다.

장은 요즘 수영으로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쉬 교수에 따르면 교통대를 방문했던 장은 "이마에 주름이 나보다 많은 학생도 있더라"며 건강을 자랑했다고 한다.

주룽지 전 총리

서열 3위였던 '서릿발 재상'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는 평범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공식적으로 거의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퇴임한지 3년이 넘은 요즘엔 동창 모임에 자주 얼굴을 내비친다. 부인과 아들 딸 모두 데리고 나온다. 동창회에서 그의 친구들은 '룽지'라고 부른다. 정치.경제 등 무거운 화제를 피해 학창 시절의 기억과 경극.음악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예전 직함을 부르는 건 맞지 않는다는 그의 고집 때문이다.

현직에 있는 후배들에게 누가 될 수 있어 회고록을 쓰지 않겠다던 그의 각오는 여전하다. 다만 재임하는 동안 결정했던 중요 정책을 되돌아보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책을 쓰는 일도 나쁘지 않겠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베이징에서 열린 칭화대 동창회에서 그는 "정책 결정에 관한 일련의 생각을 모아 책으로 묶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렴에 대한 결벽증은 퇴임 이후에도 변함없다. 그는 지난달 15일 푸젠(福建)성 푸주시 린쩌쉬(林則徐) 기념관에 수행원 없이 나타났다. 부인 라오안 여사만 그를 옆에서 부축했다. 린쩌쉬의 동상 앞에서 그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린쩌쉬는 청나라 말기 영국의 아편 밀수출에 반발, 영국 선박에서 아편을 몰수해 바다에 내던졌던 강직한 관리였다. 50여명의 관람객 가운데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사진을 찍자고 하자 그에 응했다고 기념관측은 전했다.

경극을 좋아해 종종 극장에 모습을 드러냈던 주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경극 노래를 배웠다. 또 얼후(二胡) 연주에 공을 들여 최근에는 이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주변에 자랑하기도 했다.

리펑 전 전인대 상임위원장

서열 2위 리펑(李鵬) 전 전인대 상임위원장은 재임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4권의 회고록을 펴냈다. '중지회굉도(衆志繪宏圖)-삼협일기' '첫걸음에서 발전까지-핵발전소일기' '전력이 먼저다-발전일기' '입법과 감독-전인대일기' 등 일기체로 엮어낸 재임 비화를 잇따라 출간했다. 2003년 3월 퇴임 이후 거의 1년에 한권씩 나왔다. 리펑은 소문난 메모광이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메모를 참고해 일기로 정리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 올 1월 네번째 회고록이 출간됐을 때 일각에선 일기체로 쓰고 있지만 대필자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전력 기술자 출신인 리펑은 싼샤댐,핵발전소,항만 등 임기 중 공을 들였던 프로젝트 현장을 자주 돌아보는 등 비교적 바빴기 때문이다. 의문은 쉽게 풀렸다. 취재차 그를 방문한 출판사 한 간부는 "그는 10여년전에 있었던 사건의 작은 토막까지도 기억해냈다. 모두 꼼꼼하게 정리된 수첩과 일기장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 리펑은 세부 내용이 필요할 때마다 일기에서 발췌해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회고록에 옮겼다"고 소개했다. 리펑은 원고료로 받은 300만위안(3억9천여만원)을 교육발전기금에 기증했다.

리루이환 전 정협 주석

또 정협 주석이었던 당시 서열 4위 리루이환(李瑞環)은 경극과 관련된 활동으로 자주 언론에 소개됐다. 경극에 심취해 있던 그는 자신이 직접 전통 경극 극본을 개작한 '중국 경극영상집'을 제작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톈진 청년경극단을 후원하고 있는 그는 지난달엔 직접 지방 공연장에까지 찾아가 단원들을 격려할 정도로 경극에 빠져있다. 최근엔 그가 '공산당 노(老) 간부' 라는 명의로 10년간 148명의 가난한 학생들을 후원해왔던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됐다. 톈진일보에 따르면 지금까지 그가 후원한 돈은 모두 53만위안. 월급을 저축해 매년 5만위안씩 고향인 톈진의 후학들에게 보내 배움의 길을 열어준 것.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간청하는 수혜 학생들이 몰리자 장학회는 '얼굴없는' 기증자를 공개했다. 그는 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가난했던 옛시절을 들려주며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꿈을 이루라고 격려했다.

서열 7위였던 리란칭(李嵐淸) 전 부총리는 과학교육계 공직 경험을 종합한 '교육 방담록'을 펴냈다. 회고록 성격의 이 책을 써낸 뒤 홀가분해진 리 전 부총리는 본격적으로 그의 취미 생활인 고전음악에 몰입하고 있다. 고전음악 안내 책자인 '음악필담'을 엮어낸 그는 지난해부턴 아예 음악 전도사로 나섰다. 전국 대학을 돌며 음악과 인생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강연 중 흥이 오른 리란칭은 학생, 교수들과 함께 즉석 합창을 하는 등 음악 매니아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명청 시대의 사대부처럼 전각(도장 새기기)에 취미를 붙인 그는 요즘 모차르트, 베토벤 등 존경하는 작곡가의 이름을 새기며 땀을 흘리고 있다.

서열 6위였던 웨이젠싱(尉健行)전 중앙기율검사위 서기는 전형적인 칩거 생활을 하고 있어 외부에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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