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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주도 성장, 매력적···국민에게 환상만 심어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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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진보·보수정권에서 공직생활한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은 일자리 정책과 관련된 책을 쓰고 있다. 22일 서울 방배동에 있는 김 전 장관의 개인 연구실에서 두 시간 가까이 그와 인터뷰했다. 그는 담담하면서 단호한 어조로 거침없이 답했다. [장진영 기자]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은 일자리 정책과 관련된 책을 쓰고 있다. 22일 서울 방배동에 있는 김 전 장관의 개인 연구실에서 두 시간 가까이 그와 인터뷰했다. 그는 담담하면서 단호한 어조로 거침없이 답했다. [장진영 기자]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 정부’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부처 중심이 아니라 청와대 주도로 국정이 돌아가니 장관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장관이 임명권자인 대통령 앞에서 자기주장을 펴는 건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김대환(69) 전 노동부 장관(인하대 경제학부 명예교수)은 다소 다른 구석이 있다. 할 말 다하면서 노무현 정부에서 노동장관을,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을 지냈다. 노동계와 불화했고, 진보로부터 “변절했다”는 비판을 들었지만 법과 원칙을 소신 있게 지켰다는 평가도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이 원칙론자인 김 장관에게 한마디 했다. “정치적인 감각도 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가끔 정부가 ‘바보’처럼 보여야 될 필요도 있습니다.” 김 장관의 답변이 놀랍다. “정치인 노무현에겐 ‘바보 노무현’이 큰 자산이었지만 ‘바보 정부’는 그 순간부터 망조가 듭니다.” 언제라도 그만둘 각오로 소신껏 공직에 임했다는 그를 22일 인터뷰했다.

[서경호의 직격 인터뷰] #경제학 희화화 … 경제학자 반성해야 #성장 주도하는 것은 기업 투자 #최저임금 인상 ‘숨고르기’ 필요 #소상공인 대표성 더 늘어나야 #노동시장 이중구조 깨는 게 중요 #참여연대는 경직된 프레임만 있어 #가장 위대한 스승은 오직 현실뿐 #86세대, 이론으로 현실 재단 말아야

최근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을 비판하며 결국 성장은 외피이고 속살은 분배라고 지적했다.
“경제학자들이 반성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 때 ‘근혜노믹스’라는 용어를 학계 세미나에서 쓰길래 경제학을 희화하고 경제학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용어라고 일갈했다. ‘~노믹스’는 레이거노믹스처럼 이론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을 때나 쓰는 말이지, 알맹이 없이 정책 몇 가지 바꿨다고 쓰는 건 정확하지 않다.”
소득주도 성장에 비판이 많다.
“소득주도 성장은 소득 증가가 곧 성장이라는 토톨로지(tautology·동어반복)일 뿐이다. 논리적으로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유일한 이론적 근거가 저소득층의 한계소비성향이 높으니, 이게 내수 증대와 성장으로 연결된다는 건데 이마저 한계가 있다. 저소득층 소비가 늘어도 대부분 생필품이고 주로 수입품 아닌가. 설령 성장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약한 고리에 불과하다. 그냥 저소득층 분배를 개선하겠다고 하면 되는 거다. 경제변동론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성장을 주도하는 건 기업의 투자다.”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만 부각됐지만 실질소득 증가를 위한 정부의 다양한 정책 조합이 본질이라는 거다. 현 정부 경제정책의 으뜸 구호인 만큼 대통령의 의지도 강하다고 한다.
“소득주도 성장이 얼마나 매력적인 워딩인가. 마치 내 소득이 늘어날 것 같은 환상을 국민에게 심어준다.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이 정부가 포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담는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 소득 양극화 이슈는 오래전부터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다. 저소득층의 분배 개선을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중장기적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역할도 하겠다고 정리하면 간명하다. 최저임금처럼 직접 시장에 개입하는 건 한계가 있다. 합리적인 가격 결정은 시장만이 할 수 있다. 정부도, 컴퓨터도 못한다. 물론 시장의 가격 메커니즘이 언제나 옳지는 않다. 구매력이 없어 시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제적 취약계층은 정부가 포용해야 한다. 시장에서는 경쟁을 통해 활력을 살리고 시장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사회안전망과 재정으로 돕는 것으로 정리해야 한다. 이 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너무 과대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지난해 출간된 『지금 당신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습니까?』에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얘기가 일부 나오는데 "재산보다 임금 격차가 ‘흙수저’의 원인”이라며 부의 분배보다 소득 분배가 더 불평등하다고 잘못 보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주장인데, 청와대가 이런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면 정부의 시장 개입은 더 확대될 것이다.”
이미 내년 최저임금 10.9% 인상이 확정 고시됐고 고용노동부가 재심의하지 않기로 했다. 충격을 줄이는 다른 방법은 없나.
“정부가 자영업자 대책을 내놓았던데, 재정을 쓰는 건 한시적인 정책일 뿐이다. 과거에도 최저임금이 두 자릿수로 오른 적이 있지만 충격이 크지 않았다. 이는 최저임금이 오르기 전후에 쉬어가는 ‘숨 고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어려울지라도 다음에는 숨 고르기를 한다는 시그널을 정부가 시장에 줘야 한다. 그래야 자영업자들이 버틸 수 있다.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에 소상공인을 더 참여시켜야 한다(현재 소상공인 대표는 2명). 최저임금의 지역별·업종별 차등화도 법에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청와대와 여당이 움직여야 한다. “청와대와 노조가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고 현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했던데.
“대통령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어느 시점에서는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보지만 그렇게 못할 것 같다. 조직된 노조의 주장은 반영되지만 조직화하지 않은 대다수 90% 노동자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 촛불 시위에서 드러난 국민의 요구도 마찬가지다. 목소리 큰 조직된 이들의 주장이 촛불의 대표를 자임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촛불은 최대공약수로 봐야 한다. 촛불에 담긴 국민의 공통된 의견이 중요하다. 더는 촛불에 기대지 말고 이제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줄곧 비판해왔다. 정부가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을 말하지만 실업급여 확대 같은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면서 유연성 이슈에는 진전이 없다.
“정부 정책이 유연성보다 안정성에 경도된 게 사실이다. 우리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해소는 사회경제 개혁의 핵심이다.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은 안정성 강화가 필요하고, 대기업과 공공부문은 유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결국 방법은 사회적 대화밖에 없다. 지난하고 힘든 길이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처음부터 해고를 거론하면 우리 정서상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임금, 노동시간, 기능의 유연화부터 해야 한다. 임금은 직무급과 성과급의 확대, 노동시간은 탄력적 근로제, 기능은 직업능력개발훈련 향상이 관건이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해소를 위해 공공부문에서 추진돼온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는 찬성하나.
“차별 시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돼야 맞다. 차별이 축소되면 기업도 굳이 비정규직을 두지 않고 정규직으로 할 유인이 생긴다. 결국 시장이 중요하다.”
요즘 새로운 권력이 된 참여연대에서 일했다. 청와대가 추진하는 규제개혁에 참여연대가 거세게 반대하고 있는데.
“참여연대 창설멤버였다. 활동하면서 내부적으로 법과 제도만 타깃으로 하지 말고 시민사회 자체로 관심을 넓히자고 주장했다.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법제만 들여다보면 시민단체가 정치화되고 시민 없는 시민단체, 활동가 중심의 단체가 된다고 봤다. 지금 참여연대가 그렇지 않은가. 마음이 무겁다. 콘텐트는 풍부하지 않고 경직된 프레임만 있다. 지식인 사회가 정치화된 건 국가적 손실이다.”
1999년 공저자로 펴낸 『한국재벌개혁론: 재벌을 바로잡아야 경제가 산다』에서 재벌해체론을 주장했다.
“재벌 해체가 아니라 재벌체제 해체다. 구조본 같이 책임은 지지 않고 군림하는 그룹 컨트롤타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오너 경영보다 전문경영인 체제를 염두에 뒀던 건 맞다. 하지만 지금은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전문경영인 체제의 단점과 중장기적인 목표하에 의사결정을 하는 오너 경영의 장점을 같이 보고 있다. ㈜LG에서 사외이사를 하면서 지켜봤던 게 도움이 됐다.”

김 전 장관은 1980년대 진보 학계의 유명인사였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동력을 둘러싸고 1940년대 후반에 벌어졌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간의 국제 논쟁을 정리해 84년 『자본주의 이행논쟁』을 편역했다. 영국의 모리스 돕은 봉건제 내부의 생산양식 변화에, 미국의 폴 스위지는 시장과 화폐경제의 발달이라는 봉건제의 외부에 주목했다. 이 책은 전두환 정권이 금서로 지정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책을 펴낸 이유가 궁금했다. 김 전 장관은 “모리스 돕이 일방적으로 논쟁에서 승리했다고 잘못 가르치는 분이 있어서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다”고 했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도 비슷했다. 사회구성체에 대한 개념 정립조차 없이 말꼬리만 잡는 논쟁이 이어지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 88년 필자를 모아 펴낸 『중국사회성격논쟁』에 ‘반(半)식민지반봉건사회론 : 사회구성체론인가, 정세론인가’라는 글을 직접 썼다. 한때 한국 사회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로 분석했던 서울대 안병직 교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이었다. 이 때문에 선배인 안 교수와 소원해졌다. 안 교수는 나중에 한국의 경제발전을 받아들여 중진자본주의론을 설파했다. 인터뷰에서 김 전 장관은 80년대 운동권 출신인 ‘86세대’에 날 선 비판을 날렸다.

왜 문제인가.
“86세대는 개념이나 단어를 갖고 현실을 재단하는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현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하다. 오늘의 정의가 내일의 불의가 될 수 있다. 현실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몇 가지 개념을 가지고 현실을 완전히 대상화·도구화하는 건 옳지 않다. 추상(이론)에서 구체(현실)로, 다시 구체에서 추상으로 사회를 파악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거쳐야 한다. 이런 게 진보이고 발전이다.”
본인은 진보인가, 보수인가.
“시장 얘기하면 보수고 분배를 말하면 진보인가. 폭넓게 봐야 한다. 나 스스로 진보라고 자처한 적 없다. 가장 위대한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진보, 보수 같은 이분법을 거북해하는 현실주의자일 뿐이다.”

김대환 전 장관은 …

1949년 태어나 대구 계성고와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석사)을 졸업했다. 석사 학위를 받고 인하대 교수로 일하다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옥스퍼드대에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인하대로 복귀했다. 참여연대 원년 멤버로 참여해 첫 정책위원장과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2년간 노동부 장관을, 박근혜 정부에서 3년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발전경제학』, 『민주적 시장경제』, 『한국 노사관계의 진단과 처방』, 『자본주의의 이해 :정치경제학 입문』(편저), 『한국재벌개혁론』(공저) 등이 있다.

서경호 논설위원

※인터뷰에는 변은샘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