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개혁 내건 새 경제질서|〃마이너스 성장을 막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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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80년 6월 초순 어느날 프랑스파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당시 김재익국보위경과위원장 (전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작고)은 몇몇 이들과 한국경제의 앞날에 대해 깊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비행기안에 같이 타고 있던 일행은 이경식청와대경제수석(현 대우자동차사장), 김기환부총리자문관(현 세종연구소장), 김만제한국개발연구원장(전 부총리), 한승수서울대교수 (현 민정당의원), 신병현한은총재(현 전국은행연합회장), 김경원 대통령특별보좌관등으로 이들은 파리에서 열렸던 IECOK(대한국제경제협력기구) 총회에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80년 여름의 대내외 경제상황은 지금도 다들 기억하고 있듯 최악의 상황이었다.
『오랜 경제관료 생활을 통해 그렇게 하루하루 경제가 망가지는 것은 처음 봤었습니다.」
이형구현재무부차관 (당시 경제기획원 정책조정국장) 의 회고를 굳이 인용할 것도 없이 79년의 2차 오일쇼크에다 10·26과 12·12등의 정변은 기업활동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고 게다가 냉해까지 겹쳐 농산물도 흉작이어서 80년의 국민경제는 도리없이 마이너스 성장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더구나 5·17광주사태 이후 세계 경제속에서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극도로 나빠져 민간 상업은행이든, 국제기구든 어느 누구도 한국에 추가로 돈을 대주려고 하지 않을 때였다.
그런 만큼 한국에 대한 굵은 돈줄인 IECOK 총회가 그해 6월 파리에서 열리자 경제기획원은 「당시로서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팀」을 구성해 IECOK에 보냈었고, 총회 참석 후 서울로 돌아오고 있던 이들 대표단의 분위기도 밝을 턱이 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의 이야기는 주로 국보위가 구성된 마당에 앞으로 경제정책의 줄기가 어떻게 잡혀갈 것인가 하는 데에 모아졌다.
또 군부가 정권을 잡은 마당에 과연 협조를 해야 하느냐하는 이야기들도 자연스레, 그러나 심각하게 거론됐다.
『김수석 (김재익 당시 경과위원장을 지칭)은 국보위 들어갈 때도 그랬지만 그날 비행기 안에서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나하고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었는데 오랜 이야기 끝에 「경제개혁」이란 말을 꺼내더군요. 「새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우리가 원하는 경제개혁을 받아주면 우리도 도와줍시다」라고….」
IECOK대표단의 한사람이었던 모씨의 회고에 나타나는 「경제개혁」이라는 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 김수석의 말대로 「새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그때부터 5공화국이 정식 출범한 이후까지도 그가 원하는 「경제개혁」을 전폭적으로 받아주었고 따라서 김수석이 구상하고 있던「경제개혁」은 80년 이후 5공화국의 출범을 거치며 80년대 중반까지도 그대로 우리 경제정책의 기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국보위 이후의 경제정책 집행에서 나타났듯 김수석이 생각하고 있던 경제개혁이란 바로 안정·개방·자율의 세가지 기둥이었고, 국보위가 하필이면 다른 사람 아닌 김재익당시경제기획원기획국장을 경료위원장으로 선임하고, 전두환상임위원장이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함으로 해서 이후 안정·개방·자율이 경제정책의 기조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80년 여름을 지나며 국보위가 이렇다할 「경제개혁」을 단행한 것은 없다.
지금은 아무도 당시의 일들을 두고 「개혁」이란 이름을 붙여주지 않지만 당시 국보위는 「개혁」이란 이름 아래 언론통폐합·삼청교육·공직자숙정·과외금지 등의 충격적인 조치를 거침없이 밀어붙이면서도 유독 경제분야만큼은 다행스럽게도(?) 그 근본 줄기에 손을 대볼 엄두도 내보지 못했다.
동명목재를 정리한다든가, 경제 4단체장을 비롯한 기업인 1천5백명을 국립극장에 모아놓고 「기업윤리강령」을 채택케 한다든가, 결국 한바탕의 희극적 「해프닝」으로 끝난 주택 5백만가구 건설계획을 발표한다든가, 인천 남동 공단조성계획을 발표한다든가 하는 자잘한 일에 손을 대보기는 했고, 발전설비와 자동차등 중화학투자조정을 단칼에 힘으로 밀어붙여 대기업들을 떨게 했다든가 하는 물리력의 행사는 있었어도 경제정책의 줄기에 대한 관여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정책에 관한한 국보위 때문에 동으로 갈게 서로 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기야 국보위시절에는 무슨 거시정책이 있을 필요도 또 그럴 겨를도 없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국보위는 거의 의식 안한 채 하루하루 경제의 위기관리에 다들 정신이 없었습니다. (현직 경제부처 차관모씨)
『경제부처는 국보위를 거의 모른 채 지냈던 것 같아요. 연락관이라해서 현역 영관급 장교들이 각 부처에 한명씩 나와 있었지만, 업무에 대해 간섭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연락관들이 주요 결재서류를 다 보긴 봤지요. (경제기획원 K씨)
『10·26, 12·12가 있고도 80년 6월까지는 경제에 관한한 전혀 그들의 간섭이 없었습니다. 잘했든 못했든 막후에 어떤 힘이 작용한 거 없어요.
물론 박대통령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각 부처는 주요 정책을 꼭 청와대와 협의하고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갔습니다. 그런데 국보위가 생기고 부터는 달라져 행정조직은 그대로 가도 그 의사결정은 국보위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눈에 보이더군요.
인천 남동단지나 중화학투자조정이 어떻게 됐는지 청와대에선 전혀 몰랐어요.
그러나 그런 일들은 그 전부터 각 부처에서 다 여러번 검토하다가 문제가 많아 안 된다고 덮었던 일들이에요.
무슨 정책이랄 것도 없지요. 남동공단만 해도 누가 수도권에 공단 만들면 잘된다는 걸 모릅니까. 다만 수도권인구 집중 때문에 안 된다고 덮은 일인데 그런걸 죄다 다시 끄집어 내가지고….」 이경직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의 이말은 당시의 상황을 실감있게 전해주고 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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