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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씁쓸한 숫자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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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윤정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윤정민 산업팀 기자

윤정민 산업팀 기자

야구는 어떤 스포츠보다 많은 숫자를 만들어 낸다. 모든 상황이 숫자로 기록되고, 매 순간 확률을 따진다. 최근엔 야구 보기가 더 어려워졌다.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란 통계학적 방법론이 더해지며 복잡한 지표들이 수없이 생겼다. 모든 팀이 타구의 발사 각도와 속도를 분석해 선수의 성적을 예측하고, 대체 선수 대비 승리기여도를 수치화해 평가에 활용한다.

숫자는 때로 야구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켜켜이 쌓인 기록에서 미처 몰랐던 사연을 발견할 수 있다. 변수를 줄여 이익을 내야 하는 팀 운영자나 투자자들에게도 정교한 계산법이 도움된다. 다만 응원하는 팀과 선수에 대해 불가항력적 사랑에 빠진 순진한 야구팬은 넘치는 숫자 속에서 가끔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여전히 기록으론 측정될 수 없지만, 꽤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이 숫자 때문에 외면받기도 해서다.

예를 들면 기록은 변변찮지만, 경기장 안팎에서 모범이 되고 팀 분위기를 밝게 해 다른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도록 돕는 선수. 팬들과 팀에 헌신하며, 전통을 세우고, 팬들의 사랑을 끌어내는 선수. 이런 종류의 기여는 아직도 숫자로 측정하기 어렵다. 그들이 좋은 계약을 따내고 오래 한팀에 남을 가능성도 높진 않다.

얼마 전 만난 친구는, 비교하자면 그런 선수였다. 학창시절 항상 주변을 밝게 만들고 자신의 손해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더 중요시했다. 친구들의 믿음도 두터웠다. 회사에서의 그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영업사원이 된 그의 이름 뒤에는 실적이, 숫자가 더해졌다. 회사의 실적 평가는 메이저리그만큼 치밀했다.

그에게 요즘 일한 만큼 성과가 없는 것 같아 고민이라고 말하니, 자신은 이미 ‘저성과자가 된 지 오래’라는 답이 돌아왔다. 팀의 궂은일, 상사가 권하는 독한 술, 동기의 넋두리, 해도 빛은 안 나지만 안 하면 다 같이 욕먹는 잡일 등은 그의 몫이었고 동료들도 고마워했다. 하지만 숫자는 그를 무능한 사람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숫자는 또래보다 낮은 임금과 늦은 승진으로 그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그와 나 모두가 그 냉혹하다는 프로의 세계를, 정교한 숫자의 시대를 산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성실함과 투지에 반해 팬이 된 선수가 한해의 부진으로 ‘퇴물’ 소리를 들으며 팀을 떠나는 모습도 생각했다. 물론 숫자와 기록을 만든 전문가도 평가자도 자기 몫의 일을 했을 뿐이다. 그들에겐 죄가 없다. 다만 마땅히 원망할 곳도 없는 씁쓸함은, 숫자 속에서 헤매는 우리의 몫이었다.

윤정민 산업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