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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41. 노나메기농장 일<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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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74년 나이 마흔에 장가를 갔다. 사진은 농장 일을 하느라 검게 탄 얼굴로 치른 결혼식 피로연.

"친구여, 어리석음이 더욱 커지기 전에 그대를 묶어놓고 있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게나. 시골이라면 그대와 어울릴 것이니, 나무와 물에게 먼저 베풀라. 땅 위에 그대 보금자리를 만들면, 땅과 풀이 그대를 먹여 살리리라."

심훈의 '상록수' 미국판 쯤으로 이해되는 '조화로운 삶'은 이같은 멋진 말과 함께 시작된다. 저자인 헬렌 니어링.스콧 니어링 부부야말로 자연주의자였다. 그들이 도시를 등지고 버몬트주 숲으로 들어갔듯이 나도 그랬다. 농장 이름도 좋았다. 노나메기란 새뚝이.새내기 처럼백기완이 만든 순우리말이다. '잔치 때 함께 나눠먹음'이란 뜻이다.

"걱정이 태산인가 하면, 낭만과 꿈도 태산이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새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햇살은 찬란했다. 봉우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 밑으로는 안개구름이 지나갔다. 구름은 햇살을 받을 때마다 시시각각 빛났다. 우리 뜻도 햇살과 같았다."(1989년 '다리' 10월호)

행복했다. 10만 평 땅을 얻은 뒤 필요한 물자는 서울에서 지원받았다. 백기완은 "이게 내 능력"이라는 말과 함께 20만원을 손에 쥐어줬다. 그걸로 사들인 농기구를 메고 강원도 철원으로 갔다. 그게 73년 4월. 도착 뒤 논밭과 과수용 토지를 구분한 뒤 개간을 시작했다.

열심히 일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자갈밭을 파다가 하루에 삽날을 무려 일곱 개나 부러뜨린 날도 있었다. 4월 중순 온 산이 진달래로 붉을 때 밤나무 1200그루와 호두나무 200그루가 도착했다. 나무 심는 일은 서울에서 온 패거리가 거들어줬다.

그해 6월 결혼식도 올렸다. 우리 나이로 40세에 든 장가였다. 아내는 노나메기의 새로운 동지였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던 그녀는 하루아침에 지게질에 도끼질까지 척척 하는 농사꾼으로 바뀌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때 어머니의 지원으로 움막도 조금 키웠으니 농장은 신혼의 꿈이 담긴 곳이다.

"형님. 노래 한 번 해보슈. 뱀장수 흉내도 해보고."

자리가 잡히자 서울 친구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최민(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 문학.미술판의 후배들이었다. 시골의 정취에 취했던 그들은 흥겨운 노래판을 즐겼다. 한밤 중 우리가 아무리 크게 떠들고 고성방가를 해도 저 아래 쪽에는 들릴 리도 없었다.

"이름조차 엘레나로 달라진 순이/ 오늘 밤도 파티에서 춤을 추느냐~" 하고 나는 노래를 뽑았다. 술판이 무르익을 때면 내 주특기인 뱀장수 사설이 이어졌다. 허리띠를 풀어 '생쇼'를 하는 것이다.

"자, 이 비얌이란 것,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더냐. 기막힌 물건이지. 세상천지에 삼백팔십가지가 있는디…. "

"황석영 구라보다 낫다."

"계속해!"

최민 등은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나 '나만의 이상촌' 노나메기의 평화와는 달리 세상은 점차 험해졌다. 유신 초기 '이호철 등 문인 간첩단 적발'이라는 기사가 신문 1면을 장식했다. 그때는 정말 미처 몰랐다. 그런 혐의가 시골의 내게까지 뒤집어 씌워질지는….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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