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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재난, 냉방 복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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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태희
박태희 기자 중앙일보 팀장
박태희 내셔널팀 기자

박태희 내셔널팀 기자

듣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단어 ‘살인’ ‘방화’, 앞이 깜깜해지는 단어 ‘정전(停電)’. 이들 세 단어가 올여름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돼 일제히 현실로 닥쳤다.

40도를 넘나드는 찜통더위는 연쇄살인범이었다. 5월 20일 이후 44명이 온열질환으로 목숨을 잃었다. 고온의 직사광선은 석탄 더미, 깻묵 더미, 고철이 쌓인 재활용 폐기물 더미에 자연발화를 일으킨 방화범이었다. 기업과 개인의 멀쩡한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더위 앞에 시민들이 냉방기를 풀 가동하자 이번엔 변압기가 탈이 났다.

한전에 따르면 7월 1일부터 8월 8일까지 아파트 정전 건수는 143건이나 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53건에 비해 3배나 늘었다. 열대야 속에, 그야말로 앞이 깜깜해진 시민들은 어둠을 더듬어 자동차로 피신하고는 에어컨을 켠 뒤에야 한숨을 돌렸다.

삶을 위협하고 삶의 터전을 붕괴시킨다는 점에서 폭염은 홍수·가뭄 못지않은 자연재해다. 그러나 폭염을 대하는 우리의 대비 태세는 허술하기 그지없다. 폭염을 재난에 포함시키는 재난안전법 개정안은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발의됐지만 상임위 문턱을 못 넘었다. 저소득층 전기요금을 일부 감면해 주는 전기사업법 개정안은 2년째 국회서 낮잠을 자고 있다. 여름철 한때 반짝 주목 받던 이들 법안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다른 현안들 뒤로 급속히 밀려난다.

상황이 이러니 정부나 지자체의 폭염 대책이 야무질 리 없다. 재난안전대책본부 홈페이지에 큼지막하게 내걸린 폭염 대처 요령은 ‘기상 상황에 주목할 것’으로 시작해 ‘약속 일정을 조정할 것’으로 끝난다. 서울소방재난본부 홈페이지에 내건 안내 동영상도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수분을 자주 섭취하라’고 권하는 데 그친다. 44명 연쇄살인범에 대한 대응책으론 허술하기 그지없다.

폭염의 일상화는 예견된 지 오래다. 영국 왕립학술원 로버트 메이 원장이 “온난화가 대량살상무기(WMD)만큼이나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게 2005년이다.

이제라도 살인·방화를 예방하는 마음으로 ‘더위 재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지자체는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는 노후 아파트 변압기 점검부터 나서야 한다. 보도블록이나 꽃밭 조성에 쓸 돈은 도심 온도를 1도 이상 낮춘다는 나무 심기로 돌려야 한다. 정부는 장기적으로 전기요금 체계부터 7, 8월 에너지 확보 정책까지 두루 점검해야 한다.

올여름은 더위가 생존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일임을 일깨우고 있다. 열흘 뒤면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한다는 처서(處暑)다. 가는 더위와 함께 ‘찜통에 당한 상처’도 잊혀선 안 된다.

박태희 내셔널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