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언론숙청·통폐합|비판성강한잡지 "대청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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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언론인해직·언론통폐합등 80년의 「언론대학살」이 진행되는 동안출판업계에도 메스가 가해져 대수술이 단행된다.
언론인에 대한 대규모해직을 예고하는 7월30일의 「언론자율정화및 언론인자질향상에 관한 결의」가 나온 다음날인 7월30일 문공부는 전체등록 정기간행물 1천4백43개중 12%에 해당하는 1백72개 정기간행물을 등록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문공부는 등록취소이유로▲각종비위·부정·부조리등 사회적 부패요인▲음란·저속·외설적이거나 사회범죄·퇴폐적내용▲계급의식의격화·조장및 사회불안의 조성등을 표면상 이유로 내걸었다.
이같은 정기간행물 폐간조치에이어 문공부는 8월19일 무실적·소재불명·등록사항의 변경등록불이행등을 이유로 전체 2천5백97개 출판사중 23·8%에 해당하는 6백17개 출판사의 등록을 취소시켰다.
이러한 출판계에 대한 철퇴는 전격적으로 단행돼 당시 출판관계자들은 발표당일에 가서야 이같은 사실을 알고 울분을 터뜨렸다.
당시 폐간됐던 『문학과 지성』의 김병익발행인의 증언.
『한마디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이었읍니다. 31일 당시 중앙청옆 통의동에 있었던 사무실에 출근했더니 평소 교분이 있었던 K모출판사장으로 부터 전화가 와 아침9시뉴스를 들었더니 「문학과지성」이 「월간중앙」 「창작과비평」 「씨읍의 소리」 「뿌리깊은나무」들과 함께 폐간된다더라고 알려주더군요.
깜짝놀라 라디오를 들어놓고 10시뉴스를 들었더니 사실로 판명됐읍니다. 다음날인 8월1일아침 문공부에서 보낸 등기속달행정우편을 한통 받았읍니다. 단한장의 공문서에 두줄의 문장으로 「발행목적에 위반돼 등록을 취소함」이라고 되어있을뿐 구체적인 사유나 설명은 없었읍니다. 다음날 당시 문공부공보국장인 이수정씨를 찾아가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고 항의했죠. 그랬더니 이국장은 「위의 지시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단지 행정처리만 했을뿐」이라고 답변했읍니다. 사전에 경고나 통보 한마디없었고 이국장의 답변태도로 보아 문공부차원이 아닌 외부의 입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기간행물에 대한 당시 폐간조치는 음란·외설적인 내용을담은 주간지등이 포함되어있어 일부에서는 잘된 일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대학생·지식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시사종합지·문학잡지들이 도매금으로 폐간되어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당시 계간지로 발행되다 폐간된 『창작과 비평』의 이시영편집장 증언.
『당시 계엄당국은 검열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잡지내용을 마음대로 자르고 빼고 했기때문에 폐간까지 갈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읍니다. 검열과정에서 몇차례 검열당국과 승강이를 벌인일이 있지만 결국 그들의 뜻대로 됐으니까요. 신문·방송쪽이 사전에 내용이 통고되고 자율결의라는 형식이나마 갖추었지만 출판쪽은 일방적인 조치로 말한마디 못하고 당했읍니다.
당시 출판업계가 고립·분산상태로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같은 무지막지한 만행을 저질러도 괜잖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 폐간됐던 「뿌리깊은 나무」 「문학과지성」 「창작과 비평」 「씨읍의 소리」 「월간중앙」등 독자들에게 현실의식을 깨우쳐 주었던 잡지가 당한 것은 지식인들의 글을 통한 저항을 원천봉쇄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보아야 합니다. 퇴폐주간지·잡지들과 함께 이들 시사및 문학잡지를 폐간한것은 이같은 의도를 숨기고 여론의 화살을 피하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같은 지적은 당시 정기간행물 폐간을 작업했던 문공부의 한관계자도 시인하고 있다. 다음은 그의 증언.
『당시는 정기간행물의 대규모 폐간조치를 전체적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읍니다.
일부 주간지와 통속 잡지들의 퇴폐내용은 사회의 지탄을 받았거든요. 또 화보책자등의 강매현상이 전국적으로 벌어져 민원의 대상이 됐었읍니다. 문공부에는 이같은 내용을 고발하면서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가 수십통씩 쌓였읍니다.
그러나 일부 서울에서 발행되는 시사교양지의 폐간은 다른 차원이었읍니다. 그해 7월초부터 장관과 국장의 지시를 받아 정기간행물 정비작업을 했는데 일부잡지는 이미 폐간이 결정되어있었읍니다. 당시 이광표문공장관실에는 현역장교들이 들락거려 장관실에서도 어쩔수 없었다고 봅니다. 기자협회의 협회보와 몇개대학 신문·학보도 마찬가지였읍니다. 국보위인지 보안사인지 잘모르겠지만 하여튼 계엄당국에서 주문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읍니다.
그때 이같은 교양잡지와 특수신문들의 폐간만 아니었으면 퇴폐출판물 정리가 결코 비판을 받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읍니다.』
80년 언론에 대한 이른바 개혁작업을 추진하고 집행한 곳은 보안사에 설치됐던 이상재씨 주도의 언론대책반이였다. 신문·방송뿐아니라 잡지쪽도 이들의 개혁대상이었다.
언론대책반에 참여했던 K씨의증언.
『그때 계엄상황아래서의 분위기는 모든 언론을 개편하자는 것이었읍니다. 특히 주간지와 잡지쪽은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퇴폐·저질내용뿐아니라 강매 방식은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읍니다. 당연히 수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죠. 전국에서 올라온 각종 정보가 이를 증명했읍니다. 구체적 실무작업은 문공부에서 한 걸로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같은 증언에도 불구하고『 월간중앙』의 경우를 들어보면 당시 계엄당국의 기준이 어디에 있었나 명백해진다.
『월간중앙』은 80년6월호에 실린특집 「6·25, 30년이 남긴것」중에서 6·25해에 태어난 6·25동이들이 모여 가진 좌담회 「전후세대가 말하는 통일전망」의 일부 내용이 문제가돼 폐간했다.
당시 양태조주간의 증언.
『6월호는 5월말 계엄당국의 검열을 거쳐 발행됐읍니다. 그런데 6월24일쯤인가 중앙일보에 출입하던 보안사요원이 문제된 좌담내용을 들고와 협박조로 나오더군요.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읍니다.
문제된 좌담내용은 「…6·25를 남침설, 북침설 그리고 중간설등 여러 각도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 한 체제를 합리화하려는 의도에서 남침과 북침의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가을추수때 판문점에 가본 일이 있는데 그때 북한사람들이 푸른 옷을 입고 추수하는 모습을 보고……지금까지 반공교육에서 받은 적대감과는 달리 눈물이 날 정도로 굉장히 반가왔거든요」등등이었읍니다.
이미 검열을 거쳐 발행된 내용을 갖고 문제삼는 것을 보고 기가 찼읍니다. 전체적인 좌담내용의 흐름을 보지않고 부분적인 내용만으로 문제삼는 것을 보고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죠.』
결국 『월간중앙』은 6월말 자진해서 휴간계를 문공부에 제출했고 7월말 폐간됐다.
이처렴 정화를 내세운 명분과는 달리 비판성향이 강한 잡지들이 무더기로 폐간조치된 것은 언론인해직·언론통폐합과 마찬가지로 당시 신군부등 개혁주도세력이 권력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저지른 언론말살정책의 일환이었음은 말할것도 없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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