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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철이 아부지’ 박정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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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1987년 1월 14일 저녁, 공사 현장에 있던 부산 수도국 공무원 박정기는 본청 총무과장 전화를 받고 다방으로 갔다. 서울에서 내려온 경찰 두 명이 “일단 서울로 가자”며 그를 밤 열차에 태웠다. 새벽녘 남영동 대공분실에 도착한 그를 맞은 것은 아들의 죽음 소식이었다. “조사 중 책상을 ‘탁’ 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는 황당한 설명과 함께. 막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아버지는 다음날 찬바람 부는 임진강 지류에 유해를 뿌렸다. “철아 잘 가거래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데이….” 오열은 울림이 됐고, 돌처럼 단단하던 체제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당하지 않은 사람은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이다.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는 말도 있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아들을 잃고 울다가 눈이 멀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아들을 잃은 박정기는 오히려 시대에 눈을 떴다. 정년퇴직 후 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가입해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퇴직일은 6·29 선언 다음 날이었다. 목욕탕을 차려 노후를 보내려던 공무원은 이렇게 투사가 됐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박정기는 유가협 일을 하면서도 넉넉한 품성을 보여줬다. 집회와 농성이 끝나면 마지막까지 남아 청소를 했고, 석 달간 구치소에 있을 때는 감방 동료들이 배려해 준 작은 특권까지 사양했다. 의문사 유족들 앞에선 “내 아들은 그나마 진상이 밝혀져 다행”이라며 미안해했다. 그런 그도 ‘용서’에 대해서는 신중했다.

가해 경관 중 한 명인 조한경(당시 경위)은 7년 반의 옥살이를 마친 뒤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감옥에 있으면서 박정기씨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두 차례 보냈으나 겉봉도 뜯기지 않은 채 되돌아왔다”고 말했다. 함세웅 신부에게 중재를 부탁했으나 답은 없었다. 박정기는 훗날 다른 인터뷰에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용서해 버리면 이 땅에 고문은 근절시키지 못하고, 부당한 권력은 이어 간다”고 말했다. 유가협 조직을 이끌고 가는 사람으로서 독하게 마음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대는 바뀌었다. 경찰과 검찰 같은 국가기관의 수장들이 그의 빈소를 찾고, 대통령이 애도를 보내는 세상이 됐다. 박종철의 죽음으로 결실을 본 ‘87년 체제’는 어느덧 시대적 소명을 마치고 극복 대상이 돼가고 있다. 고문 은폐 책임자였던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공교롭게  이달 초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이 하늘에서 맞닥뜨리면 어떤 말을 나눌까.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