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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와 대화조정은 큰집과 작은집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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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동국대의 일본 근기 지방 학술기행-김사엽<동국대 일본학 연구소장>
일본 천황가의 조상이라 믿어지는 야마토(대화) 조정이 형성되던 곳은 지금의 나라(나량) 시 남쪽에 위치한 고시군 명일향촌이라는 마을인데, 6, 7세기께의 이곳은 비조 또는 명일향이라 표기하고 「아스카」라 읽었다. 지역의 범위는 비조천 유역과 대화삼산이라 부르는 우네비야마(무방산)·가구야마(향구산)·미미나리야마(이성산) 등 세산에 둘러싸인 일대에 가시와라시(양원시)와 사쿠라이시(앵정시) 일부를 포함하였다. 현재는 인구7천 남짓한 농촌에 지나지 않지마는, 야마토 조정이 탄생되어 백년동안 지속되던 중 대왕능묘·사찰·석조물 등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연대적으로는 추고천황이 도유라(풍포) 궁에서 즉위하던 6세기말에서 원명천황이 나량시에 세운 평성궁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1백년 동안인데, 이 기간을 「아스카시대」라고 한다.
야마토 조정을 형성시켰던 주도세력은 소가(소아)라 부르는 씨족의 호족이었다. 그래서 아스카의 역사는 곧 소가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4, 5세기 대판 서남해안지대에는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소위 제2차 이주민들이 고분문화를 이룩하면서 호족들간에 심각한 이권대립이 첨예화되어 서로의 알력이 끊임없다가 그중 일부는 아스카 지방으로 세력을 신장했는데, 그러한 와중에 백제로부터 들어온 불교를 환영한 이른바 숭불파의 소아씨(백제파)와 이를 반대하는 배불파의 물부씨(모노베씨·신라계)와의 두 호족의 다툼이 치열했다가 소가씨의 승리로 말미암아 호족간의 대립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아스카 유적지를 돌려고 교토(경도) 역에서 근철 단원선의 기차를 타고 가시와라(양원) 역에 내려 다시 길야선을 갈아타고 아스카역에 도착, 고적지 유람 버스를 탈까했더니, 안내소에서 하는 말이 가시와라로 되돌아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대로 다시 가시와라에 와서 역 앞에 있는 렌터카회사에 가서 자동차 한대를 이틀 빌어놓고, 첫날은 우선 아스카 마을 서남쪽에 있는 히노구마(회우)란 곳을 향해 달렸다.
이곳은 제3차 이주민들이 정착한 중심지요, 또 소가씨의 영지였으며, 야마토조정 탄생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 유서 깊은 곳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도중에 국가탄생의 주역들이었던 여러 대왕, 즉 흠명·천무·지통·문무 등의 능과 몇 해전 발굴되어 큰 화제를 던진 고송총을 지나가야 했다. 와서 보니 기복이 심한 들판이 전개되고 조금 높은 지대 숲 속에 오미아시(어미아지)라는 신사가 있다.
제3차 이주집단 중에 특히 직조 기술단의 우두머리인 「아지노오미」(아지사주)를 모신 사당이었다.
5세기말께 이마키아야히토(금내한인 또는 왜한인)라 불리는 제3차 이주민이 이곳에 와서 정주하는 동안 공통의 조상을 받드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 당시의 권력자들은 그들의 세력확장에 이들 고급기술자와 지식인을 필요로 했다. 기술자와 지식인들의 직능을 보면 직물·건축·토목·금공·도공 등에서, 지식인은 문장의 작성, 외국어의 통역이 가능했다.
새로운 정부에서는 직능별 부서를 두었으니 곧 사부(문서담당) 도부(토기 굽기) 안부(마패 제작) 화부(그림과 조각 담당) 등이었다.
이렇게 하여 6세기 말부터 아스카는 갑자기 고대사의 주무대가 된다. 그 첫 막을 연 것은 소아씨의 등장이다. 그러나 소아씨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아스카와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아스카에는 소아씨가 진출하기 전에 이미 한반도로부터의 이주민집단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특히 갈성씨라 일컫는 호족이 두각을 드러내 수장이 돼있었다.
이때 회외의 이주민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고급농경기술인 북방계의 건전 개발을 통해 농토를 확대해 생산을 증대하면서 비조천동안에서 진신원으로 농토를 확대해 나가니 회우의 중심세력은 차츰 씨족적 결합을 굳게 하여 마침내 야마토아야우지(동한씨)라 일컫는 막강한 세력집단을 형성하였다.
이와 병행해서 남하내에서 갈성당에 걸쳐 권세를 장악하고 있던 갈성씨족은 차츰 동족의 아스카로 손을 뻗쳐 내목왕자(현종천황)는 아스카의 야쓰리(팔조)에다 왕궁을 지었다. 이것이 아스카에 있어 최초의 왕궁이다.
아스카가 본격적인 역사의 주무대가 되는 것은 내목왕자로부터 3대를 지난 약 1세기 뒤 6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러, 소아씨가 정계를 주도한 때에 비롯한다.
그러면 여기서 야마토 조정의 주역자인 소아씨의 출신을 밝힐 필요가 있다. 그는 어디서 나왔으며 그의 씨족의 성분은 어떠했던가. 종래 일인학자들의 견해는 구구하여 근사치를 찾지 못했다.
가장 유력한 근거자료가 되는 사료인 『일본서기』는 마자의 아들 입녹(이루카)에 이르러 그의 권세가 너무나 비대해 진데다 횡포가 심하고 방자함이 안하무인격이라 마침내 많은 반대파를 낳아 드디어 살해되니 이에 소아씨의 본 종가가 토멸되었다고 불투명한 서술을 하고 있어 출생을 규명하는데 큰 장애가 되어왔다. ·
그러던 것이 해방 후 차츰 백제계란 설이 나와 주목을 끌었고 문협정이씨(전 경도대 교수·현 경도부립대학장)가 몇몇 저서를 통하여 증명을 시도한 뒤로 지금은 거의 이 백제출신설이 정론으로 굳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논증의 핵심은 무엇인가.
문협 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즉 소아만지에 대해서 『일본서기』 이중천황 2년조를 보면 대신에 취임했다는 기사와 함께 관련사료로 인용한 『백제기』에 백제관인인 목협(나) 만치는 백제의 대성인 팔족의 하나로, 목협은 개치왕 치하에 일컫던 귀성이라고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만치와 만지와는 우연한 동음동명의 별인 인가, 아니면 동일인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지금까지의 통설로는 별인이라고 보아왔다.
그러나 목협 만치에 대해서보면 『일본서기』 응신25년 조에 있는 본문, 그리고 이에 인용된 『백제기』, 우리측의 『망국사기』 백제본기 등에 의하면 백제가 고구려와 다투던 개치왕 21년 조에 나타난 목협만치는 서로 같은 인물을 두고 다룬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응신25년조 기사에는 『앞서 대화에 와있던 직지왕은 그의 부인 아화왕이 죽었으므로 귀국했는데, 420년엔 그도 죽자 그 뒤를 구이신이 이었다. 왕이 아직 어리므로 만치가 국정을 보았다. 그런데 만치는 구이신의 모(직지왕의 비·팔수부인)와 서로 내통하여 무례함이 심했다. 드디어 대화의 응신왕이 그를 불렀다』고 돼있다.
이 기사와 함께 인용된 『백제기』에 만치는 그의 부의 공으로 임나를 주관하였는데 자주 일본을 왕래하였더니 드디어 일본서 그를 불러들였다고 나온다. 이 사서 등을 종합해보면 목협만치는 나-제 전쟁 때 남으로 내려갔다가 야마토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도일했다는 결론을 얻는다.
한편 일본측 문헌에 나타난 소아만지의 계도를 살펴보면 『일본서기』나 『고어 습귀』등의 기사를 종합해 볼 때, 5세기말 정확히는 475년에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의 목협만치와 동 일 인물임을 알게된다. 그리고 5세기말 야마토 조정에서 맞이한 목협만치의 일족과 수행원들은 무방산(우네비산) 북쪽에 있는 증아란 당에 정착했는데 이곳은 지금의 궤원시 금정정에서 증아천 유역에 걸친 일대다.
만치는 그의 아들 한자와 함께 조정의 재정, 한반도와의 외교·군사문제에 활약했고 그 뒤 후손은 점점 조정의 중추에 올라 주도권을 쥐고 막강한 권세를 키워나갔는데 만지의 5대 손인 마자에 이르러서 배불파의 거두 물부수옥을 축출하면서 대신의 자리에 올랐고 그의 혈통에서 드디어 소아계 천황이 탄생하였다. 곧 용명천황이다.
이 대왕의 생모는 흠명천황의 비이니, 그녀는 마자의 부인 도목의 딸이며, 마자의 세 자매의 맏누이인 견범원(기다시히메) 였다. 이 대왕의 다른 비도 마자의 이복누이인 혈수부간인(아나호베하시히토) 왕녀인데, 이 두 사람 사이에 즉 부모 양쪽이 모두 소아씨계로 처음 탄생한 왕족이 성덕태자(일명 구호왕자)다. 이 왕자는 일본 고대사에 찬연히 빛나는 위대한 인물로 정치와 불교에 혁혁한 공적을 세워 오늘날까지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다.
이리하여 마자는 대왕의 인척을 동족 및 동계씨족으로 만들기에 성공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야마토 조정의 대왕의 혈통에 백제의 혈맥이 흐르고 있음을 이에서 명백히 알게되며 따라서 백제와 야마토 조정은 한갓 치밀한 외교관계가 아니라, 인척관계에 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큰집 작은집 사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소아(소가·소아)라는 씨족 호칭의 뜻은 부여·고구려 등 북방계 건국신화에 나오는 천신의 호칭인 「해사수」를 「??수」(신웅)를 나타낸 것으로 사학자들이 보고 있거니와, 「소아」 또한 「웅신」을 표기한 것이라고 필자는 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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