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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敗者 부활의 기회 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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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바닷가 오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어린 시절 어머니께 가장 많이 듣던 이야기 중 하나는 '개천에서 난 용'을 주제로 하는 잔소리가 아니었나 싶다.

호롱불 아래 공부하다 졸고 있는 아들을 향해 '뒷말 누구네 아들은 아비가 술주정꾼인데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를 갔고' '이웃 누구네 아들은 고학으로 대학 나와 검사가 됐다 '는 성공 스토리의 후렴은 언제나 '개천에서 용 났다'였다.

돌이켜 보건대 그 시절 듣기 싫었던 어머니의 잔소리는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동네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개천에서 난 용'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농부의 자식도 공교육만의 혜택으로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었고, 가난한 청년이 각고의 노력 끝에 기업가로 자수성가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비록 궁핍하고 남루했지만 사회적 패자도 노력과 실력에 따라 신분상승을 할 수 있고 부자 될 기회가 상당 부분 열려 있던 시절의 얘기다. 그런데 요즈음 나의 어머니가 전하는 고향 소식에는 '개천에서 난 용'을 주제로 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쏙 빠져 버렸다. 용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사회적 패자에게 부활의 기회를 다 차단해 버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돈의 경쟁력이 입시 경쟁력인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신분상승의 출구는 원천봉쇄될 수밖에 없다.

서울대 신입생의 절반이 서울지역 학생들이고 그중 상당수가 재력이 집중된 강남 출신이라는 통계만 보더라도 주경야독하며 일류대학 나와 사회지도층이 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부자 되고 싶은 소시민의 꿈 또한 신기루가 된 지 오래됐다.

하룻밤에 수천만원씩 올라가는 강남 집값을 보면서 패배감에 젖은 서민들이 '로또 열풍'에 매달리는 심리는 당연한 현상인지 모른다. 높은 청년 실업률, 학벌사회의 장벽에 가로막혀 끊임없이 패배자가 돼 가는 젊은이들, 패자부활전의 기회도 없이 부와 신분이 세습되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절망하고 좌절한다.

꿈을 잃어버린 사회, 특히 신분상승의 기회가 꽉 막힌 사회는 비정상적으로 그 출구를 찾아 나서게 마련이다. 프랑스 혁명은 제3신분인 평민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약하고 특권계급인 귀족들의 권한을 강화한 데서 촉발됐다. 기회가 막힌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은 짓밟힌 꿈을 혁명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구현해낸다.

지난 대통령선거가 세대 간의 대결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꿈도 희망도 없는 미래에 절망한 젊은 세대가 현실의 벽을 부수고 솟아오르고 싶은 열망을 표출한 사건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상고 학력의 역경을 딛고 우뚝 선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에서 이 땅의 세습적 패자들은 희망을 발견했고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참여정부 출범 이래 패자부활전의 기회는 거꾸로 줄어들고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건강성의 상징적 징표 또한 더욱 사라져가고 있다. 학벌 철폐를 부르짖지만 그 실천적 모델의 하나였던 '신지식인 프로젝트' 같은 변변한 비전 하나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의 여파로 국가경제가 흔들리면서 20, 30대의 실업률이 급증하고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이민 알선상품에 이들이 대거 몰려든 현상은 우리사회가 절명의 위기상황임을 알려주는 신호가 아닐 수 없다.

사회정책의 잘못으로 패자가 된 이들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은 오산이다. 역사는 이들이 비정상적 출구를 통해 일탈한 사례를 교훈으로 던지고 있다.

위기의 시대, 정부의 과제는 먼저 경제를 살리는 일일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모든 분야에서 사회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한 패자부활전을 왕성하게 열어주는 일도 중요하다. 다가올 질곡의 역사를 미리 내다보고 예방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홍사종 경기도 문화예술회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