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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음주 범죄에 관대한 ‘술 취한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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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

술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기호식품이다. 적당히 마시면 신진대사를 높이고 사회생활에 활력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마신 상태에서 폭행이나 음주운전을 하는 경우에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킨다.

주취자가 구급대원 폭행해 사망 #응급실 의사에게도 폭력 휘둘러 #미국·일본은 주취자 엄벌 추세 #공무방해 범죄 폭넓게 인정해야

실제로 지난 4월 전북 익산에서 주취자(酒醉者)를 돕던 익산소방서 소속 119 여성 구급대원이 주취자에게 머리를 5회나 폭행당한 뒤 뇌출혈로 결국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일에는 익산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주취자가 의사를 마구 폭행했다. 주취자가 경찰관을 폭행하는 일은 다반사다.

이처럼 최근 주취자에 의한 경찰·소방관·의료진 폭행이 늘어나면서 더는 주취자에게 온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다. 대다수 시민이 깊은 잠에 빠지는 새벽 시간대에 대한민국의 도시 곳곳에 위치한 경찰서와 지구대·파출소에서는 단순 실수로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주취자의 행패와 소란이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이들은 술에 취했다는 이유만으로 공권력에 폭언과 폭행을 서슴없이 가한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17년 1만 2883명의 공무집행 방해 사범 중 9048명(70.2%)이 술에 취해 경찰 등에게 폭행을 가했다. 주취자에게 곤욕을 당한 사람은 경찰뿐만이 아니다. 취객에 대한 구급활동을 하던 119구급대원들도 주취 폭행의 단골 피해자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무려 564명이 폭행당했다.

한국은  ‘술 권하는 사회’다.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회식·접대 등이 많고 술을 잘 마시지 못하면 인간관계 형성에 애로가 있다는 말도 나온다. 만일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실수나 문제를 일으키면 “술이 원수지, 사람이 무슨 죄냐”며 관대하게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법적 처벌도 가볍게 해주는 경향까지 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범죄에서 피의자가 주취 상태였다는 이유로 심신미약으로 인정돼 관대한 처벌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시론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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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주취자가 폭행뿐 아니라 살인을 저질러도 변호인들은 법정에서 술에 만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부각한다. “기억이 안 난다”는 이유로 범죄의 고의성에 적극적으로 물타기를 시도한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판사들이 대부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이렇다 보니 주취에 따른 심신미약 등은 작량감경(酌量減輕)의 주요 구실로 작용하고 주취자는 상대적으로 낮은 형을 선고받는다. 주취에 따른 작량감경이 형사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처럼 음주에 관대한 사회문화와 법 제도가 폭력 등의 범죄 피해를 키운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사실 공무집행방해 처벌 수위가 선진국보다 현저하게 낮은 것도 주취 폭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미국은 경찰의 공무집행을 고의로 방해한 주취자는 현장에서 즉각 체포한다. 상대가 주먹을 휘두르면 경찰봉을 사용할 수 있고, 칼을 들고 있으면 총기를 사용할 수 있다. 범법자를 검거하다 경찰이 상처를 입혀도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경찰을 폭행한 초범에 징역 4년을 선고하지만, 상습범일 경우 최고 종신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 일본은 경찰관이 공무집행방해 가해자와의 합의를 거부하도록 하고 있다. 영국은 체포에 저항하다 경찰관을 폭행하면 상해 정도에 따라 최고 종신형까지 받을 수 있다. 최근 뉴질랜드는 구급대원과 구금 시설 직원 등 응급 상황에 가장 먼저 대응하는 공무원을 폭행하면 최소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법이 마련됐다.

개인은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를 위해 음주를 하더라도 평소 주량에 맞게 술을 마시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주변 사람들도 적당한 선에서 자제하도록 도와주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본인 스스로 조절이 안 되는 경우에는 음주 예방 클리닉 같은 곳에 가서 전문가의 상담을 받고 치료를 받는 게 필요하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더는 음주에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주취 상태에서 저지르는 폭행은 심각한 범죄라는 인식을 확산시켜야 한다. 특히 경찰관과 119구급대원 등에 대한 폭행은 ‘공무집행방해’의 범위를 넓게 인정해 엄벌해야 한다. 주취자를 보호하되 소란 행위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도록 주취자보호법을 제정할 필요도 있다. 지나친 음주는 자신의 생명과 건강뿐만 아니라 타인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범죄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인식 변화, 음주문화 선진화, 법적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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