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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윤이상 음악회'서 만난 부인 이수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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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고(故)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씨가 지난달 28일 금강산호텔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동백림 사건에 대한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다. [금강산=연합뉴스]

"하루빨리 남편의 명예회복이 이뤄져 그가 꿈에도 그리던 고향, 통영 바다에 가 한을 풀어드리고 싶어요."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평생 조국을 등지고 살다간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79)씨가 처음으로 국내 기자단과 만났다. 북한 금강산에서 열린 윤이상평화재단 주최 '윤이상 기념 음악회'에 참석한 이씨는 지난달 28일 금강산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남편 윤이상을 대변했다.

긴장된 표정으로 회견장에 들어선 이씨는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펴들고 조목조목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고뇌에 가득 찬 평생을 슬프고 외롭게 살다간 남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며 한때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씨는 명예회복을 위한 정부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올 1월 국정원의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가 "동백림 사건 관계자의 간첩 혐의는 조작됐다"고 발표했지만 이씨는 만족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국정원이 "(윤이상 선생이 간첩은 아니지만)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씨 역시 남편과 마찬가지로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후 조국과 고향을 등지고 평생을 살아왔다. 이씨는 독일 베를린 자택과 북한 정부가 제공한 평양 근교 자택을 오가며 살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국정원의 발표로 사실상 윤이상 선생의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 아닌가.

"국정원의 발표는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외국 실정을 더 감안해야 한다. (윤이상) 선생님이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하는데, 외국 사정은 다르다. 선생님은 베를린에 살았고, 당시 동.서베를린 사이의 왕래가 자유로웠다. 친구의 소식을 알기 위해 동베를린에 있던 북한 공관에 갔던 것뿐이다. 선생님은 역사에 남을 인물이다. 누명을 씌워 역사에 남겨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 남쪽 사람들 사이에 선생님은 '간첩두목'이란 인식이 깊이 박혀 있다. 정부가 사정을 충분히 참고해 '국민 예술가'를 제 위치로 돌려놓길 바란다."

-명예회복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말하는가.

"정부에서 사과를 해야 한다. 간첩도 아닌데 간첩으로 몰았다. 정부가 사과하지 않으면서 선생님의 작품을 연주하고 외국에도 가지고 나가고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작품은 마음대로 사용하면서 명예회복은 안 시키는 건 말이 안 된다. 진상조사를 한다는 국정원 관계자들을 베이징(北京)에서 만났는데 그분들이 '간첩죄가 없어졌는데 더 이상 무슨 명예회복이 필요하냐'고 하더라. 애초에 간첩 두목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한 건 어떻게 할거냐. 국민의 머리에는 이미 다 박혀 있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발표한들 누가 관심 있게 보겠느냐."

-명예회복이 이뤄진다면 남쪽을 방문할 생각인가.

"명예회복만 이뤄지면 언제든 가고 싶다. 명예회복이 되면 선생님이 꿈에도 잊지 않던 고향, 통영 앞바다에 가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

-평양에서는 어떻게 지내나.

"김일성 주석이 선물로 준 집이 있다. 산속에 있다. 평양에 가면 날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데, 가족처럼 생각하고 산다."

-윤이상 선생은 어떤 분이었나.

"원래 정의감이 지극하신 분이었다. 음악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는데, 동백림 사건으로 모든 게 다 바뀌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분단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피부로 느꼈다. 분단 상황을 용납하지 못해 남북 화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실 분이었다.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음악까지 버리겠다고 할 정도였다. 온갖 억울한 일, 부조리한 일이 닥치는데 그걸 무시하고 음악만 할 순 없다고 했다. 그래서 민족의 고뇌가 담긴 곡을 많이 썼다."

-윤이상 선생을 어떻게 만났나.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 사범학교에 취직했는데 얼마 뒤 한 음악선생이 고향에서 요양을 마치고 돌아왔다. 당시 나는 아주 어린 나이였고, 그분은 서른 넘은 노총각이었다. 조건으로 보면 하나도 볼 게 없었다. 학벌도, 재산도 없었고 외모 또한 폐결핵 3기로 병색이 짙었다. 하지만 확실히 눈에 띄었다. 특별한 조건은 없었지만 장차 훌륭하게 될 것이라는 빛을 발견했다. 그래서 모든 걸 제쳐놓고 결혼했다."

금강산=이영종 기자

◆ 윤이상음악회=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1917~95)을 기리는 남북 합동 음악회다. 윤이상평화재단(이사장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이 창립 1주년을 기념해 행사를 주최했다. 29일 금강산에서 열린 음악회에는 남측에서 이종석 통일부 장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김용태 민예총 회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으며, 북측에서는 이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이일남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장 등 40여 명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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