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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문화 충격의 주체적 수용|<이강숙(서울대교수·음악이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미국인은 좋은 사람이고 소련인은 나쁜 사람이라는 식의 교육을 받은 세대들은 이번에 소련문화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다수의 소련선수와 모스크바 교향악단 등 많은 소련사람이 서울에 왔다. 소련사람들은 흉칙하지도 않았으며, 괴상망측한 예술을 하고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으며 똑같은 예술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들이 우리보다 체육이나 예술을 더 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금메달획득 수효에도 놀랐지만 모스크바로부터 온 교향악단의 연주도 기가 막히게 좋았다. 예술을 정치적 도구로 취급하려는 이념만이 허용되는 세계에서는 도저히 길러질 수 없는 출중한 기예를 그들은 지니고 있었다. 또 기막히는 음악적 심미성 추종자들임이 확인되었다.
또 놀란 건 한국 청중들의 반응이었다. 소련음악인들의 연주에 감탄하던 한국청중을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감회를 갖게 된다. 계기만 마련되면 인간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켰다. 한국계 소련인 성악가의 연주에 보낸 한국청중의 열광적 환영은 정말 눈물겨웠다. 음악회장을 자주 드나드는 나로서 이만큼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피가 섞였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인의 뜨거운 정은 정말 대단했다. 「키타엔코」의 고도로 세련된 지휘에서나 「루드밀라·남」이나 「넬리·이」의 놀라운 기예를 보고 음악이 인간 앞에 있어줌에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소련 문화의 꽃으로부터 받은 충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 동안 독일식 음악을 금과 옥조 격으로 모셔오던 한국음악문화권이 이젠 소련 식으로 그 방향을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한 말은 시작부터 꺼내지도 말아야한다.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외래문화의 침략공세에 견디기 어려운 어려움을 겪었던가. 독일식도 되지 않지만 소련식도 가당치 않은 말이다. 소련사람이 소련 식이듯이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식의 문화예술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 편리상 독일식을 무조음악에 비유하면 소련 식은 무조음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음악적 삶이다. 그래도 그들은 자기네들의 음악적 삶을 잘도 영위해 나가고 있다.
소. 연이 우리에게 준 메시지는 그들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독일식·불란서 식·미국식으로 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잘 살고 있다.
우리는 이 때문에 문화적 충격을 주체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먹으면 건강에 좋은 음식으로 소화해야 한다. 옳게 소화하지 않으면 먹으면 먹을수록 건강에 해독을 끼치는 약물이 될 뿐이다.
음악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더 독성이 많은 약물이 된다. 주체적 소화는 주체적 반성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주체적 반성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소련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주체적 반성의 시작이다. 물론 미국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세계에 있는 나라의 사람들 모두가 우리와 같기도 하지만 전혀 다르기도 하다.
같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같다.
이 같음으로 세계가 하나되길 많은 인간들이 원해왔다.
그러나 단 한번도 우리는 하나가 되어 본 일이 없다. 인간은 같은 쪽보다 다른 쪽에서 더 힘을 쓰는 모양이다. 다른 쪽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나라의 백성은 슬픔만을 감수해야한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정치·문화적 입장이 다르다. 정치·문화적 입장의 다름은 인간 삶의 조건을 다르게 한다. 세계화합 운운은 이 다른 입장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것이겠다. 물론 우리에겐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문제보다 나라를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 우리는 이것을 꿈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하나로 만드는 일은 누가 해야 하는가. 하나로 만드는데 작용되는 수많은 변수의 역할을 하나부터 열까지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정치가들이 그것을 아는 사람이고 또 알아야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치를 모르는 일반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가들의 앎이라는 것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는 느낌이다. 이 정치가의 한계 때문에 인간은 역사상 언제나 고통 속에 살게된다.
정치가에게 이 한계를 극복하도록 기대할 수는 없다. 정치가의 앎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정치를 아는 사람들의 공수표 격의 「말」보다 정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인간적 삶과 관계되는 기본적 요구에 부응하는 길 밖에 없다.
정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엇을 기본적으로 요구하는가. 나쁘지 않은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몰고, 실상에는 나쁜 사람들을 좋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정치풍토를 없애 달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를 외면하는 어떠한 정치인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 질 것이 틀림없다.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있으니 이젠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모든 국민이 더 박차를 가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소련이 준 문화적 충격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면서 모든 국민이 민주화의 길에 동참하는 성숙한 나라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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