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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완전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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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7일 오후 평양을 떠나 도쿄에 도착한 폼페이오를 기다리고 있던 건 북한 외무성의 담화였다. 불과 5시간 전 “방북 결과는 생산적이었다”고 평가한 자신을 향해 북한은 ‘강도적’이라고 했다. 김정은과의 면담도 불발됐다. 이 수모와 충격의 순간들에 폼페이오는 무슨 생각, 무슨 후회를 했을까.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아직은 중간 단계일지 모르지만, 협상 관계자와 워싱턴의 외교 전문가들이 꼽는 3대 ‘완전한, 돌이킬 수 없는 실수(complete, irreversible mistake)’를 짚어 보자.

북한의 덫에 걸려 한·미 훈련 중단 실책 #비핵화 의지 판단, 협상 틀 짜기도 실패

미국은 ‘싱가포르 회담 취소’ 발표로 협상 주도권을 잡았다. 그런데 이걸 스스로 날려버렸다. 김계관 담화, 김영철 백악관 방문이 항복인 줄 알았다. 폼페이오의 오판이었다. 아무런 담보 없이 김영철이 백악관을 떠나고 불과 1분도 안 돼 6·12 싱가포르 회담 재개를 확정 발표해 버렸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북한의 덫”이라며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며칠 후 판문점 회담장에서 성 김 대사와 마주한 최선희 북 외무성 부상은 “다시 취소할 테면 해 보라”고 했다. 미국이 더는 회담 번복을 못할 것을 간파한, 되치기 한판이었다. 워싱턴의 한 전직 고위 관리는 “폼페이오는 머리는 좋지만 뛰어난 협상가는 아닌 것 같다”고 꼬집었다. 치고 빠지는 북한 전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한·미 연합훈련 중단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북한은 담화에서 “미국은 (훈련 중단을) 큰 양보처럼 광고했지만 우리의 핵시험장 폭파 폐기 조치에 비하면 대비조차 할 수 없다”고 깎아내렸다. 얻은 것 하나 없이 중요한 협상 카드 하나를 날려버린 게다. 트럼프의 경솔한 판단이나, 덥석 이를 수락한 우리 정부나 도긴개긴이다. 훈련은 하되 북한이 꺼리는 전략자산 파견만 유보하면 될 일이었다. 이제 와 훈련 재개? 북한으로 하여금 판을 깨는 명분만 줄 뿐이다. 빈손 회군하는 폼페이오는 의회에서 혹독한 추궁을 당할 것이다.

마지막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오해(혹은 곡해)하고, 비핵화 협상의 틀을 잘못 짠 것이다. CVID→FFVD, 비핵화 시간표(6개월→2년6개월→시간표 없음) 등 핵심 사안에서 오락가락하니 사실 협상의 틀이란 걸 짤 여력도, 시간도 없었다. 트럼프가 시원치 않으면 밑에서 받쳐줘야 하는데, 받쳐줄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중국을 업은 북한의 협상력만 커지고, 미국은 적전 분열했다. 북한이 담화에서 밝힌 “미국은 CVID, 신고, 검증 등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나왔다”는 말은 그 결과물이다. 신고·검증 없이 어떤 비핵화를 한단 말일까. 미국이 말하는 비핵화와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는 역시 달랐다.

이쯤 되면 늘 나오는 말이 있다. “북한의 말은 협상용에 불과하다”는 희망적 해석이다. 그게 맞는다 해도 그 말 자체가, 이 판은 북한이 주도하는 협상임을 방증할 뿐이다. 한 달 만에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을 외치지만 배 떠난 뒤 손 흔드는 격이다.

대화는 필요하다. 평화적 비핵화가 지향점이다. 하지만 속이 빤히 보이는 현실을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다. 우리도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속도 조절을 하며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북한을 다룰 필요가 있다. 현 시소의 불균형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북·미 간 예기치 못한 ‘빅딜’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첫술에 배부르랴” 같은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완전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미국뿐 아니라 어느 순간 우리의 몫이 될 수도 있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