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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사격·역도·조정이「한의 늪」서울서 쓴잔 마신 스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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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승패의 수레바퀴는 언제나 돌고 돈다. 그래서 스포츠 무대는 영원한 강자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12년만에 동서가 격돌한 서울올림픽도 예외는 아니다. 어제의 스포츠 영웅들이 신성에 밀려「사라지는 별」로 전락하는 이변의 승부가 속출하고 있다. 스포츠 영웅들의 부침이 가장 두드러진 종목은 육상·사격·역도·조정 등 기록경기.
42개의 가장 많은 금메달이 걸려있는 육상은 수많은 스타를 탄생시키는 스타산실의 종목답게 서울올림픽에서도 백전노장이 샛별들의 파이팅에 속절없이 무릎을 꿇었다. 허들의 황제「에드윈·모지스」(미국), 신기록제조기「파트리크·시외베리」(스웨덴), 중장거리의 여왕「메리·데커·슬래니」(미국)등 세계 육상계를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영웅들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에드윈·모지스」는 76년 몬트리올올림픽 4백m허들에서 우승한 이후 올림픽우승 두 번, 세계선수권 2연패를 비롯, 예선전을 제외한 각종국제대회에서 1백7연승의 신화를 창조해낸「허들의 황제」. 서울올림픽 4백m허들에서 가장 확실한 금메달후보로 꼽히던 33세의「모지스」는 29세의「안드레·필립스」(미국)에게 금메달을 넘겨주고 3위로 밀려났다. 12년간 누려온 그의 독주시대가 끝장나고만 것이다.
「모지스」는 25일의 4백m허들 결승에서 8번째 허들을 넘을 때까지만 해도「필립스」를 간발의 차로 앞서며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9번째 허들을 통과하면서부터 피로의 기색이 역력, 최종 직선구간에서 스피드가 떨어져 20대의 신예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3천m "우수수">
2백60㎝의 긴 보폭으로 허들과 허들사이를 불과 13걸음으로 주파하면서 10개의 허들을 단숨에 뛰어넘어 버리는「모지스」였다. 그러나 33세의 나이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모지스」시대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러나 동메달에 그친「모지스」는『아직 트랙을 떠날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모지스」의 명성에 가려져 있다가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필립스」는『항상 우상처럼 존경해온「모지스」를 이겼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슈퍼우먼들의 최대격전장으로 관심을 모아온 여자3천m는 84년 LA올림픽에 이어 또다시 무성한 화제를 남긴 채 소련의「타티아나·사몰렌코」(27)를「별중의 별」로 탄생시켰다. 전세계기록 보유자이자 LA금메달리스트인「마리치카·푸이카」(루마니아), 「비운의 여왕」으로 불리는「메리·데커·슬래니」등 걸출한 스타가 총집결한 이 종목은 서울올림픽에서도 최고의 관심을 모은 레이스. 「슬래니」는 LA올림픽에서「맨발의 소녀」「졸라·버드」(영국)와 충돌사고를 일으켜 노메달에 그친 중장거리의 여왕으로 LA이후「비운의 여왕」으로 불리던 스타.
올림픽 노메달 16년의 한을 서울무대에서 풀겠다던「슬래니」는 결승에서 10위로 처져 올림픽 악연(악연)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다. 흑인이 판을 치는 미국육상계에서 8번의 국내기록을 보유해 백인의 우상으로 꼽히던 그녀는 임신 중에도 연습할 만큼 지독한 연습벌레지만 잦은 부상과 사고의 연속으로 좌절의 눈물을 서울 하늘에서도 뿌려야만 했다.

<조정 3파전 무산>
강력한 우승후보로 LA에서「슬래니」와「버드」의 충돌사고로 행운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푸이카」는 결승에서 기권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행운은 LA로 끝나버린 것이다.
남자높이뛰기의「파트리그·시외베리」의 3위 전락도 예상 밖의 결과. 약관 19세의 나이로 LA올림픽에서 2m33㎝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차지한「시외베리」는 지난 8일 쿠바의「자비에·소호메이어」가 2m43㎝의 세계기록을 세우기까지만 해도 이 종목의 최고기록 보유자. 그러나 서울대회에서는 자신의 기록도 내지 못하고 2m38㎝의「겐나디·아브데옌코」(소련)에게 금메달을 넘겨주고 2m36㎝의 저조한 기록으로 공동 3위에 그치고 말았다.「인간메뚜기」또는「세계신기록제조기」로 각광을 받아온「시외베리」도 이제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회 벽두를 파란으로 장식한 사격은 연일 이변의 명승부로 그 막을 내렸다.
소총의 제왕「페트르·구르카」(체코), 천재사격수「이고르·바신스키」(소련), 미녀사격수「베넬라·레체바」등이 허무한 패배로 몰락했다.
「쿠르카」는 메달권에서 조차 완전히 밀려나 버렸고 자유권총의「바신스키」는 가까스로 동메달에 만족해야했다.
여자공기소총의 강력한 금메달후보인「레체바」는 8명이 겨루는 결선에조차 오르지 못한 채 예선탈락이라는 치욕을 맛보았다.
사태를 주름잡던 명사수들이 신예 명사수들에게 허무하게 자리를 넘겨준 것이다.
신구세대의 교체가 가장 두드러진 종목중의 하나로 조정을 빼놓을 수가 없다. 조정의 빅이벤트는 싱글스컬. 핀란드의 조정 영웅「페르티·카르피넨」이 올림픽 사상 두 번째로 올림픽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느냐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그러나「카르피넨」은 준결승에서 허무하게 탈락, 세계 조정계에 최대의 충격파를 던졌다.
「카르피넨」「콜베」「랑게」의 3파전 예상은 신예「 토마스·랑게」의 우승으로 끝났다. 24세의「랑게」가 35세의 백전노장「콜베」(서독)를 제치고 새로운 조정황제에 등극한 것이다.
수영에서는「미하엘·그로스」(서독)의 퇴조가 이변. 「그로스」는 LA올림픽 자유형 2백m와 접영 2백m의 2관왕으로 서울올림픽에서 최소한 2∼3개의 금메달이 유력시되던 스타. 그러나「그로스」는 자유형 2백m와 접영 2백m는 5위, 혼계영 4백m는 4위로 처졌고 접영 2백m에서 가까스로 금메달을 따내는데 그쳤다.
역도에서는 세계기록 보유자인「허줘창」(중국)의 부진이 손에 꼽힌다.
「허줘창」은 52㎏급의 인상·용상·합계에서 모두 세계기록을 갖고 있어 그의 금메달을 의심하는 역도인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체중조절 실패와 양손 엄지손가락 바닥부분의 껍질이 벗겨지는 부상이 겹쳐 3위로 밀려났다. 52㎏급은「작은 거인」전병관이 한국에 첫 은메달을 안겨준 종목.
「허줘창」은 전병관의 합계 2백60㎏에도 2.5㎏이나 뒤지는 저조한 성적으로 3위로 내려앉고만 것이다.

<오광수 패배 뜻밖>
기록경기에서만 이변이 속출한 것은 아니다. 레슬링·복싱 등 투기종목에서도 파란의 승부는 끊이지 않았다.
복싱에서는 페더급의「켈시·뱅크스」(미국)가 1회전에서 KO로 물러났다. 「뱅크스」는 세계선수권챔피언으로 이 체급의 최강자. 한국의 금메달후보로 지목되던 오광수(오광수)가 라이트 플라이급 1회전에서 미국의「카바잘」에게 판정패로 물러난 것도 예상 밖이다.
레슬링에서는 그레코로만형 90㎏급에서 소련의「블라디미르·포프프」와 74㎏급의「요우코·살로마키」(핀란드)가 허무하게 무너졌다.
「포포프」는 85∼88년 네 번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무적의 챔피언으로 각광받던 소련의 자존심. 그러나 2차전에서 핀란드의 신예「하리·코스켈라」에게 판정패 당해 분투를 삼켰다.
74㎏급의 87세계선수권자인「살로마키」는 핀란드가 손에 꼽은 확실한 금메달감이었으나 2연패로 초반에 탈락해버렸다.
김재엽이 한국에 두번째 금을 안겨준 유도 60㎏급도 파란의 승부. LA올림픽에서 약관 19세의 김재엽을 누르기 한판으로 제압, 금메달을 차지한 일본의 노장「호소카와·신지」(28)가 하와이출신의 일본계 미국인「케빈·아사노」에게 준결승에서 패배한 것이다.
「호소카와」는 3연속 한판승으로 준결승에 올랐으나「아사노」에게 2-1로 판정패해 동메달에 그쳤다.
LA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겠다고 벼르던 김재엽은「호소카와」의 패배로 결승에서「아사노」와 맞붙어 통쾌한 승리로 LA의 한을 금메달로 풀었다.
남자체조에서는 LA올림픽 3관왕인 중국의「리닝」이 완전히 몰락했다.
여자체조도 작년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종합우승을 차지했던「아우렐리아·도브레」(루마니아)가 팀 동료「다니엘라·실리바스」에게 밀려났다. 이들 두 스타는 모두 부상이 겹쳐 서울올림픽에서 퇴조해버렸다.
기록이 깨지기 위해 존재하듯 새로운 영웅의 탄생은 또 다른 영웅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다. 동서가 12년만에 격돌한 서울올림픽에서는 스포츠영웅들의 자리바꿈이 어느 올림픽보다 뚜렷하다.
감동의 서울올림픽은 이같은 이변의 승부로 더욱 드라마틱해지고 있다.
스포츠영웅들은 승리로부터는 작은 것을 배우지만 패배에서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조이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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