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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팀 왔으면 고향소식 들을텐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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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척인 금강산 아랫동네가 고향인데…올 추석은 고향생각이 더 사무쳐. 내 나이 88살에 88서울올림픽을 맞아 죽기 전에 고향소식이나 듣는가 했더니 마지막 설렘마저 물거품이 됐으니 말야』
실향민 장응석 옹(88·강원도 속초시 영랑동 130의20).
아흔을 불과 두해 앞둔 백발의 인생 여정 속에 한없는 아픔과 회한을 파묻은 채 추석을 맞는 장옹의 심정은 남다르다.『내 어릴적 어머니는 추석 만두를 빗을 때 꼭 나를 불러 옆에 앉혀 놓고 옛 얘기를 들려줬어.』
지그시 눈을 감고 회상에 잠긴 장옹의 눈시울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고향은 저 산너머지만 아무리 불러도 동토의 땅은 대답이 없다고 덧붙이는 백발의 모습에서 1천만 실향민의 아픔을 대변하는 듯 했다.
『7년전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됐을 땐 날고 싶듯 기뻤지.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의 소식이나 전해들을까 기대에 찼지』 그러나 북한의 불참소식을 듣고 설렘의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며칠간 식사도 걸렀다는 장옹은 헝클어진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마을 노인들과 함께 성화 맞이 준비에 나서 아픔을 달랬다고 했다.
장옹이 현재 비무장지대로 변한 고성군 수동면 외면리 고향을 떠나 월남한 것은 49세 때인 지난 50년l2월25일. 이른바「1·4후퇴」 열흘 전이었다.
고성 보통학교와 장전학교 고등과 2년을 마친 장옹은 25세 때 면서기로 출발, 해방 때까지 수동면장을 지냈다.
이에 지도급인사로 낙인이 찍혀 온갖 고초를 당하던 중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황이 역전, 그해 9월 국군이 북진하자 고성 경찰서 경무과장에 임명됐으나 중공의 개입으로 후퇴했다.
이때 6식구 중 부인 마영택 씨(당시35세)와 장녀 선자(당시15세) 2남 봉훈(당시5세) 3남 봉학(당시2세) 등 4식구를 남겨둔 채 장남 봉익 씨(58·당시20세·고성고3)만 데리고 월남했다.
그후 장옹은 속초에 정착, 쌀가게를 하며 고향에 돌아갈 ,날을 손꼽았으나 분단의 벽은 철책으로 가로막혀 3년 뒤 새 부인(3년 전 사망)을 맞았으나 슬하에 자식은 두지 않고 오로지 유일한 혈육인 장남 봉익 씨와 함께 장사에만 전념했다.
이렇듯 한마음으로 살아온 덕분에 가세와 자손이 번창해 집안 식솔은 10명으로 불어났고 자손들을 모두 대학까지 교육시켰다.
현재 영랑시장 옆 「영랑 미곡상점」의 38평짜리 목조 집에서 아들 내외와 맏손자 호씨(23·마을금고 상무) 내외, 증손녀 혜지 양(3) 등 6식구가 다복하게 살고있다.
결혼시킨 둘째 손자 민씨(31) 내외는 동해중학교 부부교사로, 미혼인 손녀 경희(29)·순희(26) 양도 각각 삼척군 도계국교와 서울 동대문여중 교사로 교육가족을 이뤘다.
맏손자 며느리 김선애 씨(29)는 『저는 전후세대지만 할아버지의 한 맺힌 외길 삶을 보노라면 가슴이 저민다』며 『특히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의 앨범사진을 보여주며 고향얘기를 들려줄 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했다.
『그 사람(부인)과 애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나만 살아있으니 죽었다면 죽은 소식을 알아야 추석제사상에 밥 한 그릇이나 놓을게 아닌가. 조상 성묘는 누가 하는지』여느 명절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추석 때도 빛 바랜 앨범을 들치는 장옹의 마음은 금강산 아래 수동 고향마을에 가고 있었다. <속초=권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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