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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베를린필! 16년 정든 무대 떠난 지휘자 사이먼 래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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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달 열린 베를린필 고별 공연에서 사이먼 래틀(가운데)이 맥주잔을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열린 베를린필 고별 공연에서 사이먼 래틀(가운데)이 맥주잔을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저녁 독일 베를린 외곽 올림픽공원 내의 발트뷔네(Waldbuhne) 공연장에서 특별한 콘서트가 열렸다. 영국 태생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63)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마지막으로 지휘하는 무대였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아온 청중이 객석 2만석을 꽉 채웠다.

고별 야외콘서트에 2만여 명 몰려 #마지막 연주곡은 ‘베를린의 공기’ #단원들과 맥주 들고 일일이 인사

2002년 베를린필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던 래틀은 매년 여름 발트뷔네에서 열리는 베를린필의 야외 연주회를 임기의 마지막 공연으로 정했다. 거쉬인의 쿠바 서곡, 포레의 파반느 연주를 끝낸 래틀과 베를린필은 곧 메조 소프라노 막달레나 코제나와 함께했다. 체코의 메조 소프라노인 코제나는 래틀의 부인이고, 베를린필은 프랑스 작곡가 캉틀루브의 오베르의 노래를 부부 협연으로 연주하며 지휘자와 작별 인사를 했다.

스스로 늘 말해왔듯 “미국 대통령으로 치면 네 번을 연임한 셈인 16년을 머물고” 명문 오케스트라를 떠나는 래틀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따뜻했다. 메인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인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까지 연주한 그는 앙코르 무대에서 다시 부인 코제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악기인 하프시코드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오케스트라는 박물관이 아니다.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베를린필에 현대음악 전통을 심었던 래틀은 이날 16세기 작곡가 몬테베르디의 ‘달콤한 고통’을 하프시코드로 연주하며 음악의 넓은 장르에 대한 포용을 선보였다.

단원들은 기품있는 유머로 지휘자를 떠나보냈다. 첫 앙코르가 끝나고 래틀이 무대 뒤로 들어갔을 때 오케스트라 뒷줄의 금관악기 단원들은 래틀의 머리 모양을 닮은 폭탄머리 가발을 뒤집어썼다. 하얗고 복슬복슬한 머리가 줄지어 앉은 모습을 본 래틀은 한참 웃은 후 자신의 머리카락 몇가닥을 잡아 뽑는 시늉 직후 지휘봉을 저었다. 두 번째 앙코르곡이 시작됐다. 영국을 대표하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래틀은 마이크를 잡고 “이 앙코르가 꼭 영국 축구를 위한 것은 아니다. 특히 브렉시트가 브렉시터너티(Brexit+eternity, 영원한 브렉시트)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런던의 여름음악 축제인 BBC 프롬스에서 늘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위풍당당 행진곡’은 베를린필을 떠나 고국 영국의 런던 심포니 상임 지휘자로 가는 래틀의 미래에 대한 우아한 축복이었다.

무엇보다 관객들은 여유로웠다. 맥주 파는 청년이 돌아다니고, 일어서고 싶은 관객은 일어서고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찍었다. 하얀 천에 색색깔로 ‘사랑해요 래틀’을 써온 플래카드를 든 청중을 비롯해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다함께 음악을 듣고 분위기를 즐겼다. 하루 전부터 비가 내려 여름보다는 늦가을에 가까울 정도로 추웠지만 색색의 비옷을 입은 관객은 즐거울 따름이었다.

마지막 곡은 발트뷔네의 전통을 따라 역시 ‘베를린의 공기(Berliner Luft)’였다. 래틀은 곡이 시작되자 악장과 악수를 하며 퇴장했고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없이 연주를 이어갔다. 곧이어 맥주잔을 한 손에 들고 다시 나타난 래틀은 거의 모든 단원과 일일이 인사를 한 후 오케스트라 맨 뒷줄 심벌즈 주자 옆에 앉았다. ‘베를린의 공기’의 마지막 심벌즈 소리를 래틀(지휘자가 되기 전에 타악기 주자였던)이 울리며 임기 16년이 막을 내렸다.

유머러스하고 여유로운 작별이었다. 시민은 오케스트라를 사랑하고 악단은 사랑을 돌려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지휘자와 헤어질 때 비난과 아쉬움만 오가기 일쑤인 한국의 상황이 떠올랐다. 돌아와 내년 베를린필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새로운 상임지휘자 키릴 페트렌코 외에도 래틀의 공연이 많이 예정돼 있다. 그들의 기품있고 여유로운 이행이 많은 여운을 남긴다.

베를린=박진학 스테이지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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