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가지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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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형렬(1954~ ) '가지에서' 전문

그곳으로 가려면 우리는 꽃눈에서 떨어져야 한다
별처럼 아프게
우리는 우리가 있었던 그 자리에 열매를 남겼다
아주 먼 곳에
그 열매들이 우리를 기억하려 애를 쓴다
기억이 잘 되지 않는다 그곳을 알 수 없다, 말하면서
그치만
우리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상처를 가져오고 싶어도 가져올 수 없다



꽃나무의 자연 순리를 내보이면서 꽃순에서 떨어져야 하는 꽃의 운명 혹은 우리, 그 떨어지는 아픔의 값으로 열매를 남기는 우리, 뒤늦게 열매들이 우리를 찾지만 우리는 그 상처도 가져올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꼭 상처일까. 같은 믿음이 아닐까. 같은 목적과 의식 속에서 살았던 힘겨움의 추억이 아닐까. 가슴이 뻐근해 온다.

마종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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