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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보수의 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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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외진 숲속이다. 잠시 걸으니 가족묘원이다. 충남 부여군 외산면. 2014년 여름 김종필(JP) 전 총리는 그곳을 찾았다. 유택(幽宅)을 마련했다는 안도감일까. 그의 표정은 밝았다. 풍광을 살피는 내게 넌지시 말했다. “좌청룡·우백호 명당은 아니야. 그냥 편안히 누울 데야.” 묘비가 서 있다. 비명(碑銘)은 121자. JP의 치열한 삶이 압축적으로 담겼다. 나의 감상에 JP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4년쯤 뒤인 27일 JP는 그곳에 묻혔다.

원조 보수 JP는 우아한 선동가 #“말의 매력으로 민심을 얻어야” #6·13선거 야당, 언어부터 몰락 #한반도 격랑, 보수의 재구성은 #자주 안보 의지로 출발해야 #“스스로 돕는 나라, 무시 안 당해”

비석 앞에 그가 섰다. “無恒産而無恒心(무항산이무항심)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라는 구절이 있다. 그의 시선이 멈췄다. “『맹자』는 고전이지만 오묘함은 영원해. 먹고사는 경제(항산)를 해결해야 정치 발전(항심)이 가능하다는 인간사회 이치에 대한 통찰이지.”

항산과 항심.- JP가 낚아챈 대비와 순서다. 국가 발전에서 어느 것이 우선인가. 산업화냐 민주화냐다. 그의 자부심이 우러나왔다. “선(先)산업화 성취의 토대 위에 민주화가 이룩되고 오늘의 한국이 만들어졌어.” 5·16쿠데타 논란은 거기에 따라다닌다. 그는 이렇게 일축했다. “쿠데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 말이야. 5·16은 세상의 근본과 본질을 바꿔놓았어. 그게 혁명이야.”

그는 세상을 뒤집었다. 신질서는 언어로 확장된다. “겨레의 가슴에 도전의 불꽃을 점화시켰지.” 그는 정치의 미학을 거론했다. “혁명과 예술에 공통점이 있어. 다정다감이지. 그런 성정(性情)이 있어야 터무니없는 발상도 하고 목숨도 거는 거야.” 그의 말은 향기로 조련됐다. 때로는 촌철살인이었다. 거친 직설은 배격했다. 그는 “정치인은 말의 품격과 매력으로 민심을 얻어야 해”라고 했다. 6·13 지방선거에서 보수는 몰락했다. 당시 야당 대표 홍준표의 참패는 언어 관리의 실패다. 보수의 원조 JP는 ‘우아한 선동가’였다.

박보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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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JP의 건강은 악화됐다. 보수의 참상을 아는 듯 모르는 듯했다. 열흘 뒤 그는 별세했다. JP는 보수의 위기를 예단했다. 올해 초 그는 “역사의식이 보수 정치인한테는 부족해. 그러니 현대사 논쟁에도 밀리지”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시대에 자주국방을 회고했다. “1970년대 한·미 갈등이 심했지.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핵 개발 논쟁이었어.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나갈 테면 나가라는 배수진 속에 위기를 기회로 삼았고, 중화학공업을 성공시켰어.” 그는 강대국 외교의 작동원리를 덧붙였다. “미국은 월남처럼 허약한 나라는 무시하고 철수했으나 스스로를 돕는 한국에선 철수하지 않았어.”

한반도 질서가 급변했다. 판문점 회담, 북·미 정상회담은 격랑을 일으켰다. 보수진영은 그 흐름을 타지 못한다. 거부감은 타성적이다. 보수는 미국에 기대려 한다. 주한미군을 쳐다보며 전작권 환수를 반대한다. 하지만 미국은 예전과 다르다. 보수는 ‘냉전수구’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보수의 재구성 출발점은 안보 문제다. 그것은 자주 안보의 주인의식이다. JP는 “보수 정치인들이 자주국방 투지를 배양하는 데 솔선수범해야 돼”라고 했다. 그 말은 보수 쪽에 남긴 정치적 유언처럼 내게 떠오른다.

JP는 그럴 때 드골을 기억했다. 그의 뇌리 속 프랑스는 드골의 묘한 배짱이 숨 쉰다. ‘배짱’은 프랑스의 독자적 안보와 핵무장이다. 1963년 그는 프랑스에 갔다. 권력에서 밀려났을 때다. 그는 드골의 연설 현장을 찾아갔다. “드골 대통령이 이렇게 외쳤지··· 우리에게는 나폴레옹이 있다. 잔 다르크가 있다. 우리에겐 빅토르 위고가 있다. 고집스러운 애국심의 그 연설은 내 가슴을 뛰게 했지.”

고집스러운 애국심은 리더십의 용기다. 그는 “매국노라고 욕먹을 각오로 한·일 국교정상화에 앞장섰지”라고 했다. 그의 정치인생의 명암은 엇갈린다. 성공과 환희는 컸다. 좌절과 질타도 거셌다. JP는 여유를 담는다. “처칠이 말한 지도력의 여러 용기 중에 남에게 미움 받는 용기도 있어.”

그는 가끔 정치 관전자였다. 마지막 대상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었다. 2017년 1월 반기문은 귀국했다. 참모들은 부지런히 이벤트를 만들었다. 열흘 후 JP의 관전평은 이랬다. “왜 저렇게 뛰어다니게 만드는지 이해가 안 돼. 참모들이 미숙해. 집에 칩거하고 침묵하는 것도 역설적 이벤트야. 지도자는 신비주의 면모가 필요한데 측근들이 그걸 쉽게 까먹고 있어.” 정치 9단다운 분석이었다.

JP는 그림을 그렸다. 강렬한 풍광을 화폭에 옮겼다. “피카소는 나에게 맞지 않아.” 하지만 그는 추상(抽象)의 묘미를 알았다. 그는 보수 정치의 지평을 넓혀왔다. 그는 “이상주의자가 현실주의자고, 현실주의자가 이상주의자”라고 했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