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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는 경제, 당하지 않는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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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논설위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논설위원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경제학자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영국의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 여사가 한 말이다. 요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경제학을 입맛에 따라 변형하는 이상한 정책이 판을 치는 듯해서다.

날씨, 홍보 탓 하다 “국가경쟁력 타격” 경고 받은 경제 #부주의맹에 사로 잡힌 경제 정책 … 판갈이도 고려해야

‘고용 참사’에 비견되는 5월 고용동향이 나온 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충격적”이라고 했다. 그동안의 경제 정책을 반성하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뉘앙스가 읽힌다. 김 부총리가 긴급 경제현안간담회에서 이런 토로를 할 때 반장식 청와대 일자리 수석도 함께했다.

그런데 간담회가 끝나자마자 이호승 대통령일자리기획비서관이 엉뚱한 해석을 내놨다. “5월 중순치고는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고 했다. “생산가능인구가 줄었기 때문”이란 분석도 끼워 넣었다. 고용 부진이 날씨와 인구구조 탓이라는 얘기다.

이쯤 되면 7·8월에도 고용 사정이 호전되지 않을 경우 청와대가 내놓을 답은 뻔해 보인다. 폭염과 장마 때문이라고 둘러댈 것 같다, 취업이 안 되자 자포자기한 175만명에 달하는 니트(NEET)족을 인구구조론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다.

따지고 보면 올해 들어 고용 상황에 대한 정부의 해명은 비슷했다. 2월에는 기상 악화와 설 연휴 때문이라고 했고, 그 뒤에는 공무원 시험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청년 취업자가 줄었다고 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관성이 있다. 마치 경제정책의 목표가 국가 경제가 아닌 또 다른 뭔가를 지키는 데 있는 듯 안간힘을 쓰는 모양새다.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고 있다는 식으로 버티다가 한방에 뒤집힌 경우도 제법 있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정부의 대처 방식은 그 정점이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대부분 기업이 잘 준비되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이나 학계, 심지어 정부 부처 일각에서도 경고음을 냈지만 안 먹혔다. 그러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낸 ‘6개월 계도기간’이 고위 당·정·청협의회에서 받아들여졌다. 고용부의 낙관론에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더불어민주당은 위기론으로 질책한 셈이다.

어디 이뿐인가. 오죽했으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까지 경고 대열에 가세했다. 한국의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유례없는 매우 높은 수준”이라고 했다. “국가경쟁력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이런 나라 처음 봤다는 거다. “긍정적 효과가 90%”라는 자화자찬에 대한 국제기구의 반응치고는 섬뜩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산업현장이 휘청거리는 건 정책에 대한 홍보 부족이라고 지금도 강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경제 정책 수정은 기대하지도 말라는 투다. 고정된 시야로 이념 굳히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이러면 경제를 한 방에 뒤흔들 수 있는 고릴라가 옆을 지나가도 모른다. 심리학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얘기다. 홀린 듯 한 곳만 바라보고, 경제 상황 전체를 안 보는 게 딱 그 모양새다. 경제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부주의맹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경제는 한 번 망가지면 회복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다. 이런 부주의맹이 정치적 경제학, 운동 경제학의 맹점이다. 그걸 흔히 포퓰리즘이라고 하고, 시쳇말로 내로남불이라고도 한다. 그에 기반을 둔 경제정책은 부주의맹을 십분 활용하는 마술쇼와 다를 바 없다.

이러다 당한다. 경쟁국에 뒤처지고, 경제 근간도 부식할 수 있다. 고용도, 환율도, 무역도, 내수도 파열음을 낸 지 오래다. 한국경제가 후퇴기를 넘어 이미 침체기에 들어섰다는 분석은 예사롭지 않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악몽이 한국호 앞에 버티고 서있다는 얘기다.

명색이 일자리 정부다. 일자리는 고집부려선 안 생긴다. 못 본 것, 보긴 했지만 애써 외면했던 것부터 챙길 필요가 있다. 이런 순리에까지 용기를 내야 할 정도라면 정부 내부부터 판 갈이를 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에 국가 경제가 당하기 전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