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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선출직의 적폐몰이, 영혼 없는 공무원 양산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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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동욱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김동욱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직업공무원은 선거로 뽑히는 선출직(또는 정무직)의 새로운 정책 기조와 명령에 충실히 복종할 의무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받으며 국민에 대한 봉사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즉 직업공무원은 정무직 상관의 정치적 통제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전문직업적 독립성을 발휘해야 한다. 정무직 상관은 정책 방향을 설정하고 직업공무원에게 지시·감독하며 인사권을 행사한다. 직업공무원은 자신들의 전문적 지식과 정보를 투입하고 규정과 절차를 지키면서 정책을 집행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통제와 전문직업적 독립성이 상호보완하면서 균형을 이루면 좋은 정책이 형성되고 집행될 수 있다.

정치과잉 선출직의 공무원 통제 #정책 매몰 비용에 일관성 타격 #직업공무원 면피주의 만연 우려 #선출직 권한남용 법으로 막아야

하지만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강할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전문직업적 독립성이 지나칠 경우 행정기관 이기주의 또는 관료 보신주의가 나타날 수 있다. 정치적 통제가 지나칠 경우 공무원의 전문성이 무시되고 규정과 절차가 생략되면서 정책오류나 위법한 정책 결정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선출직이 교체되는 시점에 정치 과잉의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 통제가 전문직업적 독립성을 압도할 개연성이 크다.

대통령 또는 자치단체장이 새로 선출되면서 이전 정부가 추진하던 정책을 부정하고 그동안 바람직하다고 했던 정책을 문제가 많은 나쁜 정책으로 규정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정책 수정과 폐기에 따른 매몰 비용이 생기거나 정책의 일관성 상실 등의 부작용이 일어난다. 기존 정책을 열심히 추진해왔던 직업공무원들이 비난을 받고 조직 내부에서 위상이 훼손되며, 심지어 인사상 불이익 및 징계와 사법 조치를 받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여러 위원회를 구성해 박근혜 정부 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한·일 위안부 합의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 시절의 해외자원 개발 정책 등을 적폐로 규정했다. 교육부의 사례처럼 감사나 조사를 동원해 위법·부당한 사항을 찾아내고 정책추진에 관여한 직업공무원에 대해 징계 조치를 하고 있다.

시론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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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이 빈번해지고 되풀이된다면 직업공무원들은 문제 있는 정책 결정에 대해 자신들의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견이나 대안을 내지 않게 된다. 급기야 인사권을 쥔 정무직에 한없이 동조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퇴조한다. 이들은 제기될 수 있는 문제와 반대여론 등을 무시하고 정책사업을 형식적으로 추진하게 될 것이다. 선출직의 결정이 민의를 반영한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이들의 명령과 지시에 순종하게 되며 위법·부당한 지시에도 거부하지 않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직업공무원은 정무직의 자의적 판단에 위법·부당함을 이유로 불복종하기보다는 정무직의 의사결정을 수용한다. 여러 단계의 결재를 얻고 심지어 외부 전문가와 이익집단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동원해 자신들의 책임을 희석하거나 책임을 면하려고 행동할 개연성이 크다. 공무원 조직에서 직업공무원이 자신의 소신을 표출하면서 선출직의 명령에 불복종하려면 사퇴를 각오할 수밖에 없다. 직업공무원의 소신 지키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성숙하면서 선거를 통해 정치적 이념과 정책 기조가 다른 선출직이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직업공무원이 자신들의 직업 전문성에 따른 독립성을 가지면서 신분을 보장받기란 쉽지 않다. 특히 직업공무원 계급의 정점에 있는 1·2급(또는 고위공무원단)은 인사권자인 대통령 또는 자치단체장은 물론 국회(지방의회)·정당·시민사회단체 등 다수의 정치적 이해관계자에 대한 정치적 지시·복종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집단이익을 정책 기조에서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또한 고위 직업공무원은 현재의 정치 지형뿐만 아니라 정치집단의 미래 집권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면서 정책 결정에 이견을 제시하고 공정하게 집행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있다.

직업공무원의 중립성과 책임성을 강조하는 교육·훈련이 필요하지만, 그 효과는 장기적으로 나타난다. 당장의 해법은 정무직과 국회·정당 등 정치권에 있다. 국회는 지난 3월에 정부가 제안한 공무원법개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 공무원이 위법·부당한 상관의 지시·명령에 불복할 수 있고,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명시해야 한다. 선출직 공무원의 의사결정 정보를 공개해 선출직의 권한남용을 억제하고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

김동욱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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