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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근로 아니면 휴식’ 이분법적 판단이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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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권 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권 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7월부터 시행되는 주 52시간 근로제 때문에 요즘 매주 80시간씩 일합니다.” 농반진반 던진 인사·노무 담당자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실제로 산업현장은 야단법석이다. 저마다 고충도 각양각색이다. 지금까지 근로 관행은 주 68시간이었으니 무려 16시간만큼 ‘근로시간 다이어트’를 해야 할 판이다. 혼란이 생길 만도 하다.

근로가 아니면 휴식이라는 #이분법적 판단구조 한계 있어 #‘나를 따르라’ 방식 밀어붙이면 #좋은 정책도 껍데기만 남게 돼

그게 전부는 아니다. 먼저 근로시간 개념부터 바로 세워야 할 판이다. 점심시간에 샌드위치를 먹으며 회의를 하고, 1박 2일 직장 워크숍도 가며, 퇴근 후 카톡으로 자료 찾아 달라고 하면서도 정작 근로시간을 따져 본 적은 없었다. 근로시간 단축을 둘러싼 혼란은 지금껏 근로시간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온 탓이 크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월화수목금금금’은 직장생활의 미덕이었다. 할증임금 역시 쏠쏠했다. 특근이 ‘특혜’인 현실에서 근로시간 규제는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노사만의 잘못이 아니다. 정부의 방임도 한몫했다.

근로시간 단축은 그저 근로의 양만 줄이는 문제가 아니다. 노동시장의 체질을 바꾸고,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다. 광범위한 실태 조사는 필수다. 세부 대책도 꼼꼼하게 마련해 뒀어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11일에야 고용노동부는 근로 시간 단축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법 시행을 불과 20일 앞둔 시점이었다. 한참 늦은 감이 있다. 여전히 모호한 구석도 눈에 띈다. 불가피한 면도 없지 않지만, 노사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대목이 걸린다. 법 개정보다 제도 안착이 훨씬 어렵다. 가이드라인이 끝일 수는 없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많다.

시론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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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핀셋 지원에 나서야 한다. 근로시간 단축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지만 문제는 획일성이다. 산업구조는 매우 다원화돼 있다. 일하는 방식도 복잡다기하다. ‘근로’가 아니면 ‘휴식’이라는 이분법적 판단구조로는 한계가 있다. 독일의 ‘근로시간 법’이 근로시간 이외에 대기 근로와 근로 대기, 그리고 호출 대기시간을 따로 구별하는 이유다. 인력 사정도 제각각이다. 숙련 기량 인력을 구하는 게 어려운 분야가 틀림없이 있다.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게 맞다. 정부의 획기적 직업훈련 대책과도 맞물려야 한다. 일하겠다는 사람 자체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정년이 훨씬 지난 고령자까지 현역으로 일해야 하는 영세 중소기업이 허다하다. 인원을 충원하란 말이 통할 리 없다. 해외 건설 사업도 속수무책이다. 임시로라도 특단의 인력대책과 사회안전망 강화에 나서야 한다.

둘째, 불법과 편법은 막되, 법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인한 혼란만큼은 신속히 해소해 줘야 한다. 정보기술(IT) 업계의 경우 사무직이야 어쩔 도리가 없겠지만, 프로그램 개발 업무 종사자가 일하는 시간과 장소 선택이 자유롭다면 혹여 법상 재량 근로에 해당할 여지가 없는지 따져 볼 일이다. 조선업에서는 해상 시운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완성된 배를 바다에 띄워 놓고 마지막 점검을 하는 절차다. 근로자가 선실에서 쉬면서 대기하고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투입되는 방식이라면 ‘단속적(斷續的)’ 업무로 보고 합리적 대안을 마련할 수도 있다. 임원급 직원이나 차량 운전기사도 마찬가지다.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관리·감독 또는 비밀 취급 업무에 해당한다면 애초에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막연한 불안을 방치하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셋째, 이참에 52시간 근로 그다음 단계까지도 고민해 주었으면 한다. 52시간 근로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게 틀림없다. 4차 산업혁명으로 닥칠 노동시장의 변화는 가히 예측 불허다. 언제까지고 근로 시간의 양에만 매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휴식 시간의 보장일지 모른다. 흥미롭게도 독일은 ‘노동 4.0 백서’를 통해 ‘미래의 근로자 상’을 그려 놓고 있다. 바로 ‘호숫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는 근로자’와 ‘자신이 스스로 세운 스케줄에 따라 일하는 근로자’다. 한국도 이래야 한다면 정부의 고민은 빠를수록 좋다. 지금과 같은 소모적 혼란은 한 번이면 족하다.

정부가 노사 당사자일 수는 없다. 그래도 그들의 눈으로 보고, 듣고, 공감했으면 한다. 조금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꼭 그래야 한다. 노동정책의 성패는 여기에 달려 있다. 근로시간 단축도 예외일 수 없다.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순간 아무리 좋은 정책도 껍데기만 남고 만다. 과거 수많은 정책이 그런 수순을 거쳤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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