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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거북선 신화'는 식민사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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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문중양 지음, 동아시아, 352쪽, 1만3000원

우리는 선조들의 성과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과학이 언제나 자랑스러운 발전만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물론 세종대왕 때의 성과는 엄청났다. 자격루와 같은 시보(時報) 장치, 수표(水標)와 측우기를 비롯한 치수(治水)장치, '칠정산내외편'으로 대표되는 역산법이 개발됐다. 놀라운 정도로 정교하고 수준 높은 성과였지만, 그 후 빠른 속도로 퇴화됐던 것도 사실이다.

금속활자도 더욱 정교하게 개량됐지만 서양과 같은 사회 혁명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우리의 전통 과학이 서양의 근대 과학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산통계학과 출신으로 공채를 통해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임용된 이력의 문중양 교수는 '우리 역사 과학기행'에서 전통 과학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전통 과학은 그것이 처해 있었던 특정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운 역사 유물들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첨성대는 현대적 의미의 천체 관측 천문대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천문에 대해 묻는' 활동이 이뤄지던 공간이란 것이다. 영조 때의 수표(水標)가 세종 때의 수표보다 훨씬 더 엉성하게 제작됐던 것도 한양의 인구 증가 등 환경 변화로 치수(治水)의 방법과 목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또 저자는 조선의 금속 활자는 서양에서와는 달리 중세 사회의 성숙한 유교 문화를 발달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과학 패러다임의 차이는 조선 말기 서양 근대과학이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나름대로의 성리학적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던 당시의 실학자들은 서양 과학이 전해준 지동설이나 만유인력을 수용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하는 논리적 기반은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전통 과학의 패러다임은 단순히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게 됐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당혹스러운 주장이 없지 않다. 특히 우리가 믿고 있었던 역사 상식들이 이렇게 쉽게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때로는 믿기 어렵다. 단 문제제기로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우선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고 있던 거북선이 왜적을 물리친 일등 공신이 아니었다고 그는 말한다. 당시 조선의 주력 군선은 일본의 주력 전함(세키부네)보다 훨씬 뛰어난 기동력과 화력을 갖추고 있던 2층 구조의 판옥선이었다. 거북선은 그런 판옥선을 부분 개조한 것으로 기동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근거리 돌격용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중에 건조된 거북선은 겨우 서너 척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은 자체 추진력을 가졌던'신기전'과 다연발 발사대였던 '화차'를 개발할 정도의 막강 화약기술도 갖고 있었다. 그러면 오늘날의 거북선 신화란 무엇일까. 저자는 조선의 판옥선과 화학 기술을 평가절하하려던 일본의 식민사관을 우리가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결과라고 주장한다.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됐던 다라니경의 운명도 충격적이다. 705년 경에 제작된 목판 인쇄본인 다라니경의 등장은 세계 인쇄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다. 그런데 당나라 측천무후 시기에만 쓰던 특이한 한자가 들어있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의 유물로 인정돼 버렸다고 한다. 유럽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섰던 세종 때의 측우기도 역시 청나라의 연호가 새겨져 있다는 이유로 중국의 유물이 됐다. '조선왕조실록'의 명백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박물관에 조선에서 제작된 해시계 '앙부일구'가 여전히 일본의 유물로 분류돼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이유에 대해 아직도 만족스러운 정설(定說)을 찾아내지 못한 것도 안타깝다. 우리 역사학계의 분발이 절실하다. 50년 전 찰스 퍼시 스노우가 지적했던 '두 문화'의 벽을 허물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다.

이덕환 교수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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