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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사회개혁 차원서 과외 수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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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공직자 숙정으로 새정부 출범의 인적 토대를 마련한 신군부는 다음 단계로 국민적 관심과 지지를 끌기 위한 정책개발에 나섰다.
그들이 착안한 것은 많은 국민들이 뭔가 문제 있다고 느끼는 것을 일거에 해결함으로써 힘을 보이고 환심을 사자는 것이었다. 물론 국가백년지계와 과감한 실천이라는 이상도 있었다. 그 첫째 대상이 문교정책이었다.
『군인들의 발상에 의해 이뤄진 7·30 교육개혁은 체제의 모순을 교육부문에 전가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모색한 반면 교육이 정치에 종속되고 교육 내부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했다』
국보위에 의해 「7·30 교육개혁」조치가 내려진지 8년, 정권의 주역이 바뀐 뒤인 지난달 22일 국회 문공위에서 박석무 의원(평민)은 개혁조치의 공과를 이렇게 혹평했다.
과외수업 금지, 대입 본고사 폐지, 졸업정원제 실시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7·30 교육개혁조치가 권력의 체제 유지용이었는지, 아니면 순수한 교육개혁이었는지는 별도의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졸업정원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개혁조치가 그동안 원상으로 되돌아갔고 마지막 남은 과외금지조치마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야당의원들의 혹평이 나오고 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국가백년대계의 근본인 교육의 기틀을 바로 잡고 우리 사회의 큰 병폐로 문제가 되고 있는 과열 과외 현상을 근절하기 위하여 「교육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방안」을 만들어 금년부터 시행에 옮기기로 결정하였읍니다.
막바지 장마가 기승을 부리던 80년7월30일 오전 서울삼청동 국보위회의실에서는 오자복 문교공보분과위원장(현 국방장관)이 폭탄선언과도 같은 교육개혁안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우리 교육의 현실을 크게 바꾸어 놓으며 파문을 몰고 온 7·30 교육개혁 조치는 이렇게 모습을 나타냈으나 개혁의 산실인 국보위는 우연찮게도 일찍부터 문교부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80년5월31일 국보위 설치 발표가 있기 약1주일 전쯤 김 대령이란 낯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중앙교육연수원 건물을 비워달라는 일방적인 요구였죠. 우선 만나 이야기하기로 하고 찾아갔더니 모 기관이 들어오기로 했으니 중앙교육연수원 건물을 비워주고 이미 이야기가 된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으로 이사하라고 하더군요』
당시 문교부 기획관리실에 근무했던 K씨는 중앙교육연수원 자리에 막강한 기관이 들어올 것으로 짐작은 했지만 그 기관이 세상을 뒤바꿔 놓을 국보위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국보위 현판식이 있던 6월5일 전두환 상임위원장은 분과위원장과 위원이 모인 첫 회의에서 훈시를 했다.
전 상임위원장은 이 훈시에서 『국가의 안정과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혼란요인을 배제하는데 최우선적인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란 전제 아래 9개항의 지침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교육개혁의 방향을 짐작케 하는 부분은 둘째와 아홉째 항목.
『학원에서 학구목적의 서클활동이나 자치활동 등 자율적인 권리와 합법적인 의사 표시는 최대한 보장할 것이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인 불법시위 및 소요행위 등은 국력의 불필요한 소모와 사회 혼란 등 결과적으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므로 기필코 근절되어야 하겠읍니다. (둘째 항목)
『학원의 기업화와 과열 과외 등 비뚤어진 교육풍토의 쇄신과 퇴락한 윤리 도덕관을 바로 잡아 도의사회를 구현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 항목)
국보위가 후에 발간한 『국보위 백서』는 이날 전 상임위원장이 훈시에서 제시한 9개 항목이 국보위의 「국정개혁 추진지침」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당면과제 해결을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교육개혁의 주역이 된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의 구성원을 보면 위원장에 오자복 육군소장, 간사는 김상준 대령이었고 분과위원은 허문도·김행자·허만일·안병규·염길정·정태수·권숙정씨 등이었다.
국보위 문공위가 개혁사업 과제로 처음 손댄 것은 과열 과외 문제였다. 『당시의 분위기는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다뤄 해결하겠다는 의욕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당시 과열 과외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의 범위를 넘어 「망국과외」로 불리고 있었고 「과외 때문에 못살겠다」 「과외를 없애주면 대통령표 찍어주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읍니다.
문교부 산업교육국장에서 대학국장으로 자리를 옮긴지 1주일만에 국보위 문공위원에 임명됐던 정태수씨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씨는 『과외 문제를 해결하려다보니 이와 연관된 대학입시 방법 및 대학 정원 등 교육 전반으로 범위가 넓어져 결국 교육정상화라는 명제가 붙게되었다』 고 덧붙였다.
정씨는 국보위가 해체된 뒤 입법위원을 거쳐 81년4월부터 83년7월까지 문교부차관으로 교육개혁안을 실천에 옮기다 그후 서울교대학장을 지냈고 현재는 국정교과서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정씨와 함께 교육개혁의 실질적 주역은 김행자씨. 김씨는 이대교수(정치학)로 재직중 국보위에 발탁된 뒤 입법위원을 거쳐 11대 국회의원(민정·전국구)에 진출했으나 82년11월11일 위암으로 별세했다.
국보위가 「사회개혁 차원에서의 교육개혁」으로 과열 과외 문체를 첫 수술대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이러했다.
80년 당시 교육개발원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교학생 가운데 14·9%인 1백46만명이 과외수업을 받고 있었다. 대도시 인문고 학생의 경우 최고 43·9%가 과외수업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과외학생들이 지출하는 총과외수업비는 연간 3천2백75억원으로 추산되었고 이 금액은 80년 정부예산의 6%, 문교부 예산의 30%에 해당됐다.
이 같은 과외수업비가 전국 국민학교의 학급당 학생수를 최소한 30명 이상 감소시킬 수 있는 막대한 금액인데도 이 재원이 음성적·변태적으로 낭비됨으로써 학교교육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분석이었다.
이 같은 과외수업비 지출로 인해 학부모의 92%가 가계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반응도 나왔다.
과외학생의 80%가 진학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대입 문호는 상대적으로 좁아 70년 7만5천명선이던 대입 탈락자가 80년 29만6천명선으로 늘었고 재수생도 70년 4만5천명선에서 80년에는 18만4천명으로 계속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 같은 상황 개선을 위해 정부측도 고심해온 것은 사실. 76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재수생 종합대책, 대입 과열경쟁 해소방안, 과열 과외 해소대책이 계속 연구, 추진되어 왔었다.
어쨌든 국보위의 교육개혁연구는 한국교육개발원(KEDI) 김영철 박사(당시 교육정책연구실장) 팀에 떨어졌다.
『6월 중순께 국보위로부터 연구과제가 내려왔읍니다. 그런데 사실 이 과제는 우리가 연초부터 「학교교육정상화를 위한 과열과외 해소대책」이란 이름으로 연구를 추진해왔기 때문에 생소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당초 연말까지로 된 연구일정을 앞당기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읍니다.
김 박사팀이 그해 3월10일 만든 연구계획서는 『현재 과열되고 있는 과외공부는 학생의 전인발달을 저해하고 학교교육 활동을 마비시켜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풍토를 조성하고 있음은 물론 가정 경제의 악순환을 초래하고 국민의 위화감을 조성하는 등 하나의 중태에 빠져 사회병리화되고 있다』 고 지적, 『교육적 측면 이외에도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제 측면에서 과외공부가 발생하게된 원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종합대책을 수립할 것』 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초 연구목적은 과열과외 해소에 두었읍니다. 과외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교육적인 제도, 사회풍조, 의식구조 등 전반적인 개선을 통해 교육풍토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김 박사팀은 7월초부터 남서울 호텔 객실에 자리를 감고 문공위의 교육개혁안 마련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했다.
남서울 호텔엔 주로 김행자 위원이 드나들며 연락을 맡았고 문교부측에서도 K씨·L씨 등 주로 대입제도와 과외문제 담당부서 관계자가 나와 실무작업을 도왔다.
그러나 이미 방향이 설정돼 있는 상황에서 학자들의 참여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국보위운영의 성격을 잘 나타내준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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