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병고의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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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사람마다 크고 작은 갈등을 안고 있다. 하나 둘도 아닌 많은 갈등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산다는 것이 곧 갈등이다. 갈등 속에 살면서 그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이 곧 인생이다. 이건 어쩔 수도 없는 하나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있는 갈등이지만 불행히도 그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다. 해결방법도 다르고 갈등을 보는 시각도 다르다.
피하려고만 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피한다고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니다. 더 큰 갈등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걸 알면서도 우선 피하고 보자는 사람이다. 피하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그만 주저앉고 만다. 실의와 낙담으로 재기불능의 늪 속에 허위적거린다. 인생을 아예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체념형도 있다. 운명이니 팔자니 하면서 물결치는 대로 밀려다니는 사람이다. 저항도 없고 해결해볼 엄두마저 못 내보는 사람이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체념이 철저하면 아예 갈등을 느낄 수도 없게 된다. 이쯤 되면 사는 게 아니고 그냥 존재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타협하는 사람도 있다. 양심을 속이고 동조하는 사람이다. 겉보기엔 성공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세속적인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의식하지만 않는다면 영화를 누릴 수도 있다. 소위 성공한 사람 중에는 이런 유형도 적지는 않다. 돈이 궁하면 양심을 속여서라도 치부하는데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
좌절·체념·타협 어느 형도 참다운 삶의 자세는 아닐 것이다. 건강한 삶도 물론 아니다. 건강한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등을 해결 못하면 노이로제에 빠진다. 때론 일신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힘들더라도 정면 도전해야한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갈등이 있기에 약해지는 게 아니고 그럴수록 더욱 강해져야 한다. 갈등을 안고 뒹구는 고민 속에 그 인생은 더욱 진실해진다.
「하이네」의 시를 읽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그의 시는 온 세계인이 애송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전혀 낭만적이지 못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부터 그랬다. 학생운동으로 조사를 받고 친구와의 결투로 정학을 당했다. 문학작품은 교회 및 귀족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판금 당했다.
방랑생활에서 각혈, 프랑스 망명, 병고와 고독 속에서도 그는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비 참 속에서도 조국 독일의 비참함을 세계 양심에 알렸다. 문학을 권력의 손에서 뺏어 그 진실성과 아름다움을 세계인에게 돌려준 것이다.
어떤 갈등도 죽음을 직면한 병고만큼 심각하진 않을 것이다. 죽기로 마음을 굳힌다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그런 병고의 깊은 갈 등속에서도 인간의 진실성과 아름다움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깊은 갈등이 인간을 진실 되게 만드는 것이다. 평화와 정의로운 땀에서는 예수도 부처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갈등의 늪에서 인간의 진실이 꽃피는 것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핀다.<이시형·고려병원·신경정신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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