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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악성 정율성 씨 미망인 9월 방한 |「잊혀진 남편 일생」찾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덴마크와 네덜란드대사를 역임한 중국외교의 원로이며 해방 전 의열단단원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했고, 오늘날 중국국민이 존경하는 위대한 한국출신 음악가 정율성의 미망인 정설송 여사가 서울에 올 것 같다.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정여사는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원회 (위원장 함석헌 옹)의 초청을 받아 오는 9월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될 예정인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정 여사는 이번 방한 중 남편이 생전에 귀향하지 못했던 고향 광주시 양림동을 대신 찾아보는 기회도 가질 것 같다.
정률성의 일생은 오늘까지 중국 남경과 상해의 의열단시대, 모택동·주덕·주은내 등과 함께 항일투쟁 했던 연안시대, 조선 의용군 혁명군정학교 교육장으로 무정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했던 태행산 유격대 시기,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입북, 조선인민군 문화부장·협주단 단장·조선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을 지낸 평양시대, 중공당의 소환결정에 따라 한국전쟁 발발직후 북경에 돌아가 중앙가무단에서 창작활동 했던 시대, 문화혁명에 의한 혹독한 탄압 속에서「한국인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도 창작에 열중했던 만년 등으로 파란만장하다.
그러나 그의 전설적이며 신비롭고 강렬한 독립투쟁과 음악예술창작의 일대기는 지금까지 한국현대사 범주의 밖인 중국대륙에서만 존재 해 왔다.
그의 미망인의 방한은 현대사의 그늘 속에 묻혔던 그의 일생이 햇빛을 보게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정률성은 1918년 8월13일 빈농 정해업의 4남1녀중 막내동이로 현 광주시 양림동에서 태어나 사립 숭일학교를 졸업했다. 12세 때 전주 사립신흥중학에 입학, 당시 관립학교에서 거의 가르치지 않았던 한글과 우리역사를 배웠다.
신흥중학 3년 수료 후 15세 때(1933년 5월)조국독립을 열망하는 청년들과 함께 중국 남경에 건너가 김원봉이 지도하는 의열단 간부교육을 받았다. 그가 동행한 친구 중에는 전국회의장 신익희의 사위 김재호도 있었다고 한다.
1941년 그는 그가 가르치던 음악대대장인 중국처녀 정설송과 결혼했으나 신혼 7개월만에 당의 명령에 의해 당시 팔노군 포병대장 무정을 따라 태행산에 갔다. 이에 앞서 그는 유명한 모택동의 연안문예좌담회에 참가했는데 아마도 그가 여기에 참석한 유일한 한국인으로 생각된다.
그의 어머니 최영온씨는 광주에서 해방 후 아들 부은(아명)의 소식을 수소문, 1948년 평양에 찾아가 극적인 해후를 했으며 북경에 함께 간 것으로 알려졌다.
만주북부의 동포들을 찾아함께 생활하며「흥안령가」,「채벌가」를 작곡했고 그밖에 농민을 위한 「행복한 농부」,어린이를 위한 「평화의 비둘기」,「푸른 조국」,「소년선수가」, 공·해군을 위한 「함대행진곡」,「비행사 행진곡」등을 작곡했다. 특히 1962년에는 진의의 주관으로 공연된 그의 가극 「망부운」이 격찬을 받아 그는 중국최대의 작곡가로 부상하게되었다.
그러나 문화혁명 10년은 그의 창작권을 박탈했다. 모택동 등 중국 창건자들이 칭찬했던「연안송」까지도 부르좌적 감성의 노래라고 비판당했다.
1976년10월 문화혁명이 끝나자 즉시 복권,「주은내 동지」의 조가와 중국 건군 50주년기념작품을 창작하던 중 1976년12월 7일 뇌일혈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음악은 오늘에도 중국에서 더욱 명성을 높여가고 있다. 그의 사망 5주기 때는 북경에서 성대한 추모음악회 가 열렸다.
현 중국의 국가부주석인 왕진은 83년 북경인민음악출판사에서 낸『정률성가곡선집』에 「정률성동지를 회상하며」라는 글을 실었다.

<주섭일 편집위원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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