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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집사] #13. 깔끔한 건 좋아하지만 목욕은 하기 싫다구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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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내가 만만하다. 나무가 집주인이고 나는 집사니까 당연한 소리다. 싱크대의 빈 그릇을 핥고 벽지를 물어뜯고 책상 위 물건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등, 하지 말라는 행동들을 눈 하나 깜빡 않고 계속한다. 고함치고 혼을 내도 잠깐 현장을 피했다가 슬그머니 다시 돌아온다.

[백수진의 어쩌다 집사] #(13) 자나 깨나 '물'조심

집사가 물을 들면 얘기가 달라진다. 말썽을 멈추지 않을 때 분무기에 물을 담아 몸통이나 다리에 뿌리면 곧바로 줄행랑을 친다. 나무는 물을 끔찍하게 무서워한다. 이젠 분무기를 흔들어 찰랑거리는 물소리만 들려줘도 효과가 있다. 하다 하다 말로는 안 될 때 꺼내는 방책이다.

나무뿐 아니라 대부분의 고양이는 물과 친하지 않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지만 절대다수가 그렇다. 고양이의 조상이 사막에서 왔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물이 몸에 닿기만 해도 기겁을 하고, 마시는 물의 양도 개에 비해 적다. 반려견과 주인이 함께 들어가는 수영장이 하나둘 생겨나는 가운데 고양이 수영장은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단지 반려묘 수가 적어서는 아니다. 대부분의 고양이에게 수영장이란 그저 고문 시설에 불과해서다.

매일 제 발로 욕실에 들어가 물을 뒤집어 쓰는 누나를 이해할 수 없는 나무. 걱정 가득한 눈을 하고 누나를 기다린다.

매일 제 발로 욕실에 들어가 물을 뒤집어 쓰는 누나를 이해할 수 없는 나무. 걱정 가득한 눈을 하고 누나를 기다린다.

물이 고양이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집냥이들은 아주 가끔, 몇 개월에 한 번씩만 목욕을 한다. 밖에 살던 길냥이를 주워와도 당장 물 목욕을 시키지는 않는다. 물티슈나 젖은 수건으로 꼼꼼하게 닦은 뒤, 고양이가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고 안정을 찾으면 그때 씻기는 게 옳은 방법으로 알려졌다. 스스로 털을 고르고 청결을 유지하는 ‘그루밍’ 습성이 발달한 것도 어쩌면 목욕을 최대한 가끔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나무도 집에 오고 4~5개월 뒤에야 첫 목욕을 했다. 목욕을 시킬 타이밍을 기다리면서 내심 기대를 했다. ‘우리 나무는 성격이 순둥순둥 태평한 게 왠지 목욕을 좋아할 것 같아!’라고. 물론 헛된 기대였다. 분무기로 물을 살짝만 뿌려도 도망가기 바쁜데 목욕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목욕하는 내내 나무는 목이 쉬어라 울어대며 욕조를 탈출하기 위해 필사의 몸부림을 쳤다. 발톱도 있는 대로 세워 내 몸을 마구 찍었다. 고양이를 목욕시킬 땐 팔다리를 감싸는 두꺼운 옷에 고무장갑으로 중무장을 해도 모자란다는 걸 그땐 미처 몰랐다.

첫 목욕을 마친 나무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욕실에서 최대한 먼 방으로 도망가서는 삐쭉삐쭉한 젖은 털을 그루밍할 정신도 없이 털썩 주저앉아 ‘세상에 믿을 인간이 하나도 없어’라는 듯 땅만 쳐다보던 그 모습을….

날카로운 첫 목욕의 추억.

날카로운 첫 목욕의 추억.

물이 너무나도 무서운 나무는 나까지 물로부터 구하려고 한다. 불 난 곳에 소방관이 달려오듯, 집 안 어디든 물소리가 나는 곳엔 나무가 달려간다. 누나가 욕실에 들어가 세수를 해도 후다닥, 설거지하려고 싱크대에서 물을 틀어도 후다닥. 다급하게 달려와서는 물의 위험성을 경고하듯 여느 때보다 소리를 높여 운다. 샤워를 하려고 욕실 문을 닫으면 울음소리가 한층 더 구슬퍼진다. 누나가 물 요괴에게 잡혀가는 줄 아는 게 분명하다.

그만 좀 울라고 문을 열어놓고 씻어도 막상 욕실 안으로 들어오진 않는다. 누나를 지키고는 싶지만 물속으로 뛰어들 자신은 없다. 나무는 누나가 물 줄기를 뚫고 살아 돌아올 때까지 문밖에서 애처롭게 바라만 본다. 이토록 나를 걱정하는 나무를 보면 고양이가 무심하다는 것도 다 틀린 말이다. 적극적인 애정 표현보다 걱정하는 마음에서 사랑을 느낄 때가 있다. 욕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나무를 볼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자나 깨나 물조심, 꺼진 물도 다시 보느라 바쁜 나무야. 물도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닌데… 다음 목욕 때는 조금만 친해져 주면 안 될까?

글·그림=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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