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거꾸로 돌리는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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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무회의는 11일 문교부가 상정한 고교평준화 개선 안을 보류시켰다.
국무위원들의 중론은 고교평준화를 풀면『중학교를 영수학관으로 전락시켜 정상교육을 해치고 과외를 부채질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명문고교가 등장해 고입 재수생이 생기고 대도시의 교통문제가 악화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마디로 우리 나라 국무회의의 수준이 그 정도인 것에 실망하게된다. 한담도 아니고 나라의 백년대계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깊은 사려도 없이 우리 나라 교육의 근간이 되는 고교 교육문제를 지금대로 내버려둔 것은 적이 한심한 노릇이다. 지극히 전문적인 문제를 놓고, 지극히 비전문적인 사람들이 좌지우지한 셈이다.,
각의에서 설왕설래된 문제들은 이미 대통령자문기관으로 설립되었던 교육개혁 심의회에서 골백번도 더 논의된 일이다. 교육개혁 심의회는 3년여를 두고 교육전문가들이 폭넓은 연구와 여론수렴 과정을 거쳐 제시한 문제를 놓고 다시 진지한 토론을 거쳐 고교 평준화 개선 안을 제출했었다. 우리는 교육개혁 심의회 안이 선택의 여지도 없는 최선의안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국무회의가 간단히 밀어 내버릴 정도로 가치 없는 안은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국무위원들보다는 더 많은 시간과 더 깊은 연구와 더 전문적인 판단 끝에 채택한 의견이라고 믿고 싶다.
물론 15년 동안 시행해온 고교평준화의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교간의 교육격차, 과열과외, 교육과정의 비정상화 등의 문제를 완화시키는데 공헌한 바는 적지 않다.
그러나 실력이 들쭉날쭉한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초점 없는 강의를 강행하면 효율적인 수업운영은 곤란할 수밖에 없다. 사학의 건학 이념이나 독자성마저 평준화되어 교육의 수월성이나 자율성이 위축되는 등의 문제는 쉽게 외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대체 「명문」을 사회악시하고 기피하는 논리도 이해하기 어렵다. 각기 다양한 자질과 개성을 가진 사람들을 능력에 따라 위로 이끌어 올리기보다는 개개인의 특성이야 어찌 되었든 밑으로 끌어내리는 하향평준화의 교육제도는 무슨 말로 합리화할 수 있는가.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도 명문학교 없는 교육제도는 없다. 좋은 학교를 눈흘겨 보는 교육제도란 상식 밖의 일이다. 열심히 공부시키는 것을 나라가 앞장서서 가로막고 못하게 하는 교육제도는 올림픽을 여는 우리 나라 밖엔 없다. 국무위원들이 그런 교육제도를 더 두고 보자고 주장하는 나라는 또 어디에 있을까.
시대는 한시가 급하게 교육의 다양화, 다원화, 수월성을 요구하고있다. 우리 나라처럼 교육재원에 쪼들리는 나라에서 사학설립은 백번 권장하며, 나라에서 먼저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세계의 명문고교나 대학은 대부분이 사학인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평준화는 그런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사학문명은 단 한사람의 천재가 아쉬울 정도로 첨단을 다투고 있다. 공장에서 그저 많이만 만들어 내다 팔면 되던 시대는 이미 어제의 일이 되어가고 있다. 양의성장이 덜 중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질의성장과 발전이 더없이 중요한 다급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응하지 않고는 어느 나라, 어느 사회도 새로운 세기에 도전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교육의 질을 높이는 길뿐이다. 우리는 오늘의 교육수준과 방법에 만족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 앞에 서있다.
그런 뜻에서 학생은 적성과 능력에 따라 학교를 선택하고, 학교는 학교교육 목적에 따라 학생을 뽑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시대를 거꾸로 바라보며, 시계를 뒤로 돌리는 국무회의의 교육관은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현행의 고교 교육제도로 얻는 작은 이익보다는 그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큰 것을 잃고있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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