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폭격 현장서 부른'위 아 더 월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미국의 팝스타 라이오넬 리치(왼쪽)가 14일 미국의 리비아 공습 20주년을 맞아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토고 출신의 도미니크 발루키와 함께 열창하고 있다. [트리폴리 로이터=뉴시스]

"위 아 더 월드(우리는 하나)."

20년 전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리비아인들을 기리기 위해 14일 밤(현지시간)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열린 특별콘서트. 미국의 세계적인 팝 가수 라이오넬 리치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 이렇게 노래 불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스페인의 테너 호세 카레라스와 오펠리아 살라도 미성(美聲)을 보탰다.

60여 명의 서방 오케스트라가 자리한 연주석 뒤의 발코니에는 30여 명의 리비아 어린이가 하얀 천사 복장을 하고 촛불을 흔들며 '위 아 더 월드'를 합창했다. '천사'들이 서 있던 자리는 20년 전 미국의 폭격을 맞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살던 관저 발코니였다.

1986년 4월 15일 오전 2시 30분쯤 이 관저는 미군의 공습으로 쑥대밭이 됐다. 카다피는 몇 시간 뒤 생후 15개월 된 수양 딸의 찢긴 시신을 안고 나와 울부짖었다. 당시 40여 명이 사망했다.

공습 20주년을 맞은 카다피는 올해 이 원한의 자리에 미국 가수를 초청해 자유와 평화를 위한 잔치 마당으로 꾸몄다. 지난 19년 동안은 매년 미국을 비난하는 행사를 벌여 왔다. 서방과 더 이상 적대적 대치를 하지 않겠다는 카다피 대통령의 의지 표현이다. 범아랍 일간 알하야트는 16일 "이보다 더 서방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여 줄 순 없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라이오넬 리치는 "리비아 국민 여러분, 사랑합니다. 다시 오겠습니다"고 말했다. 1000여 명에 달하는 리비아 고위층과 가족, 외교관들이 모인 청중석에서 "우리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목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렸다. 행사에 참석한 리비아 주재 한국 대사관의 김상진 참사관은 "신선했다. 이례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평화의 콘서트는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에서도 열렸다.

폭격 당시 열 살이었고 지금은 서른 살이 된 카다피의 딸 아이샤는 "미국이 공습한 두 지역에서 이제 평화의 싹을 틔우고 싶다는 게 우리의 의지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는 "20여 년 전 미사일로 나의 어린 시절은 망가졌지만, 이제 상처를 아물게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날 행사의 이면에는 리비아의 이중성도 드러났다. 리비아 정부는 15일 미국에 의한 공습 20주년을 맞아 미국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폭격 20주년 세미나에서는 아마드 이브라힘 리비아 의회 부의장이 나와 "미국은 재앙받은 나라" "부시는 미쳤다" 등의 발언을 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 리비아 공습=미국은 20년 전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기습했다. 사망자 3명을 포함해 2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86년 베를린의 미군 전용 디스코텍 폭발사고가 리비아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서다. 이후 리비아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88년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니제르에서 항공기 테러 공격을 감행해 20여 년 이상 국제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아 왔다. 그러나 2003년 리비아 정부가 이 항공기 테러 공격에 대한 책임을 시인하고 배상 용의를 밝히면서 양국 관계는 화해 단계로 접어들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