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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훌륭한 한반도 운전자가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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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26일 판문점 회동은 파격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남북 접촉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런 만남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정상회담은 미리 완벽히 준비하는 게 상례다. 경호상 불안도 있다. 그런 부담을 넘어설 만큼은 상대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는 뜻이다.

파격적인 통일각 남북정상회담 #남북관계의 새로운 다리 만들어 #흔들리는 남·북·미 협상 테이블 #수사 화려해도 메시지 분명해야 #각자의 비핵화 입장 분명히 해 #합의 내용 분명해야 실효성 있어

사실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하다. 남북 사이에는 통역이 필요없다.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거리다. 판문점은 서울에서 50㎞, 평양에서 150㎞다. 열악한 북한 도로 사정을 고려해도 반나절 거리다.

미국에 부딪힌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쪽을 지렛대로 삼으려 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한번 뚫리면 남북 사이의 새로운 길이 될 것이다. 문 대통령 표현대로 “친구처럼 일상적으로” 회담을 할 수 있게 됐다.

모든 게 순조로운 건 아니다. 북·미 회담이 출렁이며 위기를 겪었다. 좀 더 훌륭한 운전자가 되려면 무얼 해야 하나. 문재인 대통령의 발 빠른 노력에도 당사국들 사이에 오해가 깊다. 미국은 한국을 충분히 신뢰하고 있나. 문 대통령은 통일각 회담 내용을 미국 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직접 통화한 건 아니다. 사전 협의 여부에도 답하지 않았다.

한·미 정상회담이 21분에 그친 것은 의외다. 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들고 갔다. 김 위원장을 곧 만나기로 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물어볼 말이 많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남북 정상은 도보다리에서 30분간 비공개 대화를 했다. 회담 중단을 선언할 생각이었다면 더욱 더 문 대통령의 의견이 궁금하지 않았을까.

김진국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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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의 발언을 “통역할 필요 없다”고 말한 대목도 두고두고 의문이다. 청와대 측 설명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좋은 말일 거니까”라고 했어도 그렇다. 문 대통령의 말을 미국 기자들에게는 전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부 언론이 보도한 것처럼 “전에 들은 말일 테니까”라고 했다면 정말 심각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북한 담화와 문 대통령이 전한 내용과 다르다고 물었다는 뉴욕타임스 보도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지만 북·미 회담을 북한과 미국이 서로 상대가 제안했다고 주장하고, 북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이 점점 커진 과정을 돌아보면 영 개운치가 않다. 적어도 그런 추측을 할 만한 정황들은 남기 때문이다.

북한도 그렇다. 갑자기 남북 고위급 회담을 취소하고, 풍계리에 참관할 한국 기자들의 입국을 질질 끌었다. 북·미 관계가 삐걱거리지 않았어도 갑자기 통일각 회담을 제안했을까.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남북 관계를 중단한 이유가 뭔가. 미국과 북한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 우리 정부 책임은 아니다. 그러나 며칠 만에 상황이 뒤집힐 합의라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 입장도 좀 더 투명했으면 한다. 외교적 수사는 화려하다. 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물쩍 전달하면 오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기대치가 높으면 실망도 크다. 자칫 큰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집 거래 때 ‘싸게 판다’거나 ‘집주인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곁가지다. 꼭 필요한 건 분명한 ‘희망 가격’이다.

문 대통령은 27일 기자회견에서 “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말하느냐는 외신기자의 질문에 “북·미 회담에 합의한 것은 미국도 북한의 그런 의지를 확인한 것 아니냐”고 에둘러 답변했다. 문 대통령의 입장이 분명하지 않다. 북한이 정말 무슨 말을 했는지 불분명하다.

그동안 북한 발언만 모아 보면 ‘핵 동결’에 가깝다. CVID에 연결할 직접 언급이 전혀 없다. 판문점 선언에서도 가장 마지막 구절에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고 붙여놨다. ‘핵 없는 한반도’는 북한이 북·미 핵 군축을 가리켜 왔다. 풍계리도 추가 핵실험과 관련된 시설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따뜻하고 생산적’이라고 평가한 김계관 부상의 담화는 ‘단계별 해결’이라고 했다. ‘트럼프 방식’이 ‘현명한 방안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했다는 말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이기를 기다렸다는 말에 가깝다. 미국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아니다.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합의 자체가 목표인가, 전쟁 위기를 막는 게 목표인가. 완전한 비핵화인가, 현상 동결인가. 계약서는 분명히 써야 한다. 불분명한 합의는 계약 파기의 구실이 된다. 기대 수준만 높여서는 또 다른 불씨가 된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