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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내 한 표는 누가 가져갔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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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날. 서울 필동에 사는 이은필·허원규씨 부부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동원동 제1 투표소로 갔더니 누가 이미 자기 투표용지를 받아 투표하고 갔다는 것이다. 유권자 명부에는 ‘김복기’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름도 전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투표용지를 받아갔을까.

4·19, 6월항쟁, 민주화 과정은 #내 한 표 찾기 위한 투쟁의 역사 #여론조사, 낮은 응답률 핑계 대나 #선거는 투표한 사람 의사만 반영 #투표 포기는 싫은 사람 밀어주기 #투표 않으면 정책 불평도 말아야

이날 자 중앙일보에는 희한한 일들이 수없이 발견된다. 같은 필동에 사는 김창성씨도 이미 다른 사람이 자기 대신 투표해 고발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대구 동구의 신천·신암동 18개 투표구에서는 유령투표 통지표 1만2119장이 발견됐다. 두 개 동 유권자의 무려 20%에 해당하는 숫자다. 주로 무단전출자와 미성년자들이었다. 전남 목포에서는 불과 한 달 전인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선거 때보다 유권자가 70만 명 늘어났다.

경북 문경에서는 동·이장이 유령투표 통지표 200장을 갖고 있다 적발됐다. 전북 진안 투표율은 101%였다. 유권자보다 투표자가 많은 웃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충남 서천에서는 여당 참관인이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투표함에 넣으려다 야당 참관인에게 걸렸다. 농촌에서는 ‘막걸리와 고무신’이 뿌려졌다. 야당은 집권당인 공화당이 500~1000원에 표를 매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폭로했다. 공개투표도 있었다. 경찰관이 투표함 호송을 방해하다 구속됐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했다. 불과 50년 전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을 하려 했다. 개헌선인 국회 3분의 2 의석이 필요했다. 온갖 무리한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러고도 공화당은 50%, 신민당은 33%를 얻었다. 하지만 소선거구제라 의석은 129대 45로 개헌선을 훌쩍 넘겼다.

김진국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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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한 표가 중요하다.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4·19혁명,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으려는 6월항쟁, 모두 내 한 표를 찾기 위한 투쟁이었다. 평등한 투표권은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여성이 투표권을 가진 것도 대부분 20세기에 들어서다.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는 영국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것은 불과 100년 전인 1918년이다. 남자와 같은 21세부터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보다 10년이 더 지나서다.

그런데도 그 한 표를 절실하게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하다. 내 한 표가 없다고 뭐가 달라지느냐는 생각이다. 후보들이 고만고만하다. 마음에 꼭 드는 사람도 없다. 누가 당선되나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냉담하다. 이런 생각이 투표를 접게 한다.

다행히 지방선거 투표율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지방선거가 부활한 첫해인 1995년 68.4%를 예외로 하면 51.6%(2006)→54.5%(2010)→56.8%(2014)로 개선되고 있다. 더구나 8, 9일 이틀간 실시된 사전투표는 무려 20.14%나 됐다. 4년 전인 2014년 6·4 지방선거 때의 11.49%보다 거의 갑절이다. 최종 투표율이 그렇게 뛰어오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4년 전보다는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최근 여론조사에 대한 불만이 부쩍 늘어났다. 특히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주변에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가 거의 없는데 어떻게 80% 가까운 지지율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과학적 근거도 내세운다. 낮은 응답률, 지난 대선 문 대통령 지지율과 응답자 가운데 문 대통령 투표자의 확연한 차이….

그 주장이 영 엉뚱한 소리 같지는 않다. 야당 지지자들이 여론조사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다. 노령층의 투표율은 젊은 층보다 높다. 그렇지만 정말 선거라면 어떨까. 선거는 결과가 말한다. 여론조사라면 응답하지 않는다고 달라질 게 없다. 하지만 투표하지 않은 권리는 사라진다. ‘숨은 표’는 인정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여론조사에서 내가 원하는, 혹은 싫어하는 후보가 압도한다고 투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숫자는 허수일 가능성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대 선거에서는 한 표에 승부가 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한 박빙 대결이 대부분이다. 개표 과정에서 시소를 벌이는 대결도 흔히 볼 수 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경기도 광주에서 두 표 차이로 떨어진 문학진 후보의 별명은 ‘문두표’가 됐다. 2008년 강원도 고성군수 보궐선거에서는 두 무소속 후보가 같은 표를 얻었다. 재검표 결과 1표 차이로 당락이 갈렸다.

마음에 꽉 차는 후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가장 싫어하는 후보를 밀어주는 꼴이다.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그것도 하기 싫다면 세금·일자리·교육을 놓고 입을 대지도 말아야 한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