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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집사] #12. 사료 바꾸기보다 어려웠던 화장실 바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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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와 내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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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 아기를 키우는 부모는 이 세 가지를 지키기 위해 24시간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러고 보면 나무는 참 착한 아이였다. 지나치게 잘 먹어서 사람 밥까지 탐내고, 가르친 적도 없는데 정해진 장소에서 배변을 처리하고, 매일 밤 네 다리 쭉 뻗고 잘 잤으니. 안 먹고 안 싸고 안 자서 속 썩을 일은 없었다. 화장실 교체를 시도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백수진의 어쩌다 집사] #(12) 새 화장실 증후군

 “내가 개냥이인줄만 알았지? 나도 예민할 줄 아는 고양이라고!”

나무는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그냥 좀 다르게 생긴 모래에다 응가만 하라는 것뿐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 하기 싫은지 나무는 한 달 넘게 새 화장실 적응을 거부했다. 화장실과 모래를 한꺼번에 바꿔서 적응이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막화를 막아줄 새 모래는 소변을 흡수하지 않고 아래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소변 패드를 넣을 칸이 따로 있는 전용 화장실을 써야 했다. 그런데 화장실을 바꿔 두면 대소변을 온종일 꾹 참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끈기와 인내 그리고 약간의 창의력으로 나는 나무를 새 화장실에 적응시켰다. 그리고 사막에서 해방됐다. 새 화장실, 새 모래 속에 수줍게 숨어 있던 ‘맛동산(고양이 똥. 손가락만 한 과자처럼 생긴 모양 때문에 이런 별칭이 생겼다)’을 처음 발견한 순간에는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한 달 이상 마음 졸이며 시도했던 다양한 방법을 순서대로 정리해 봤다.

정 든 화장실 위에서 일광욕 중인 나무.

정 든 화장실 위에서 일광욕 중인 나무.

① 배설물을 옮겨 둔다.
‘고양이 화장실 교체 101’에 해당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 기존 화장실에 쌌던 배설물을 새 화장실 모래 위에 옮겨 두면 된다. 배설물 냄새를 통해 새로운 장소를 화장실로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 방법만으로 새 화장실에 무난히 적응한다면 당신의 고양이는 천사다.
화장실 두 개를 나란히 두고 새 화장실에 배설물을 옮겨 두었지만, 나무는 오래된 화장실만 찾았다. 새 화장실에 앞발을 집어넣어 모래를 휘적거리기만 할뿐, 절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② 모래를 섞는다.  
나무가 쓰던 모래는 자연의 흙과 거의 똑같은 형태였다. 새로 산 모래는 알갱이 하나하나가 지름 5mm 정도의 작은 원기둥 모양이었다. 모래가 발에 닿는 느낌, 냄새, 긁을 때 나는 소리 등 모든 게 이전과 달랐다. 이처럼 알갱이 형태가 다른 모래로 바꿀 때는 두 가지 모래를 섞어가며 서서히 적응을 시키면 좋다. 원래 쓰던 화장실에 새로운 모래를 조금씩 섞는 것이다. 그러면 ‘엥, 발에 이상한 게 걸리네’에서 ‘아, 이런 게 있어도 화장실이구나’로 생각이 옮겨가게 된다.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새 모래 비율을 꽤 늘렸는데도 곧잘 이용을 하기에 화장실을 새 걸로 바꿨다. 혹시 몰라서 새 화장실 안에 기존 모래를 조금 섞었다. 하지만 나무는 귀신같이 새 화장실을 알아보고 발길을 끊었다. 나는 몇 시간을 기다리다 마지못해 옛날 화장실을 다시 꺼내길 반복했다. 나무가 대소변을 오래 참다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병이라도 생길까 무서워서 옛날 화장실을 오래 치워두지 못했다.

③ 쌀 때까지 기다린다.
나의 소심함이 나무의 적응을 막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안이 없으면 새 화장실을 쓰겠지? 나는 강수를 두기로 했다. 기존 화장실을 치우고 새 화장실만 꺼낸 뒤 출근을 감행했다. 출근하며 나무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쉬 마려우면 저기 가서 싸야 해! 저기 싫으면 바닥에라도 싸! 옛날 화장실 없이도 싸보는 거야!”
퇴근 후, 대변은커녕 소변의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화장실 상태를 본 나는 기겁을 해서 옛날 화장실을 꺼냈다. 나무는 집에 돌아온 집사보다 화장실을 더 반가워하며 폴짝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④ 포기한다.
화장실을 꼭 바꿔야 할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바닥에서 모래 좀 치워 보겠다고 애를 이렇게 고생시켜야 하나. 나무는 원하는 곳에 응가를 할 자유가 있다. 사막화를 막겠다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나무의 평화롭던 배변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결국 원래 쓰던 화장실을 제자리에 두었다. 다 떨어져 가던 기존의 모래를 다시 주문했다. 그냥 이 모래를 오래오래 쓰라는 신의 계시인지, ‘원 플러스 원’이어서 두 봉지나 왔다.

⑤ 화장실 두 개를 합친다.
주문한 모래가 도착하자마자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새 화장실의 후드(뚜껑)를 벗기고, 모래를 담는 바닥 부분을 기존 화장실 안에 통째로 집어넣는 방법이다. 새 화장실의 사이즈가 좀 더 작아서 가능했다. 나무가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새 모래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오래된 화장실의 퓨전 형태였다.
다음 날 아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모래에 삽질을 하다가 꿈에 그리던 존재를 발견했다. 다른 생명체의 배설물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환호가 절로 나왔다. 산삼을 발견해도 그보다 기쁘진 않았을 거다.

⑥ 새로운 세상과 인사하세요.
역시 시작이 중요했다. 한 달을 애태우고 새 모래에 첫 볼일을 본 나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새 화장실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젠 오래된 화장실 없이 새 화장실만 꺼내 둬도 편하게 이용한다.
더 이상 집 안에서 모래가 밟히는 일은 없다. 고양이를 키우며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배운다. 모래 바닥과의 이별은 단언컨대 지난해 경험한 최고의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글·그림=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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