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금융산책] 에르도안의 '금리 포퓰리즘'에 터키로 번진 긴축 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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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국 경제 위기의 도미노가 시작되는 것일까. 위기를 야기할 수 있는 세계 경제의 ‘폴트 라인(단층선)’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리라화 급락시킨 터키 대통령의 궤변 # “금리 내리면 물가 떨어질 것” 주장 #금융시장, 투자자 불안감 부추겨 #깜짝 놀란 투자자들 리라화 내던져 #올해 달러대비 통화값 14.79% 추락 #외채 많아 취약한 경제 더 악화 우려 #아르헨티나 이어 금융위기 위험 고조

 첫 번째 폴트 라인은 이미 무너져 내렸다. 아르헨티나는 자본 유출에 따른 통화가치 하락에 시달리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렸다.

 두 번째 도미노 블럭이 대기 중이다. 다른 단층선으로 꼽히던 터키의 경제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AP=연합뉴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AP=연합뉴스]

 15일(현지시간) 터키 리라화 가치는 미 달러당 4.4513리라까지 하락하며 사상 최고 수준까지 떨어졌다. 올해 들어 리라화 가치는 14.79% 추락했다.

시장의 불안감을 부추긴 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궤변’이다. 영국을 방문 중인 에르도안은 15일(현지시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통화개입 확대를 시사하며 “금리를 내리면 물가가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금리를 내리면 자금 조달 비용 등이 떨어지며 시중에 돈이 풀리게 된다. 풍부한 유동성은 자산 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물가도 밀어 올린다.

 물가 오름세를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1980년대 초반 미국 물가가 급등하자 폴 볼커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기준금리를 연 20%까지 올리며 물가 오름세를 진정시켰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에르도안의 생각은 경제 통념과는 다르다. 그는 “금리가 오르면 가계와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이 늘어나는 탓에 물가가 오른다”고 주장했다. 금리를 낮추면 비용 압력이 낮아지고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판매할 수 있어 물가가 낮게 유지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에르도안은 고금리가 인플레를 억제하기보다는 인플레를 유발한다는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에르도안이 ‘고금리’ 정책에 날을 세우며 심지어 중앙은행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는 까닭은 뭘까. 다음 달 24일 치러지는 조기 대선과 총선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다음달 24일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1일(현지시간) 터키 하카리에서 열린 야당 대선 후보의 유세장에서 지지자들이 국민들이 국기를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다음달 24일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1일(현지시간) 터키 하카리에서 열린 야당 대선 후보의 유세장에서 지지자들이 국민들이 국기를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CNBC는 “에르도안의 목적은 금리를 낮춰 가계의 빚 부담을 줄이고, 청년층 일자리 창출에 필요한 경제 성장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에르도안은 “통화정책으로 인해 국민이 어려움을 겪으면 그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며 “대통령이 통화정책에 영향을 끼친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줘야 한다”고 말했다.

 에르도안의 궤변과 선심성 공약에 놀란 곳은 금융 시장과 투자자다. 시장은 리라화 투매로 응수했다. 15일 터키 리라화 가치가 역대 최저치까지 떨어진 것은 시장의 이러한 불안감이 반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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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NBC에 따르면 지난해 터키의 경제성장률은 7.4%에 달했다. 물가는 10.9%나 올랐다. 과열된 경기를 진정시키고 물가를 잡으려면 금리 인상이 필요하지만 반대로 움직이는 터키의 경제 정책에 투자자가 고개를 돌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리라화 가치 급락은 터키 경제를 더욱 취약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터키의 총 외화 표시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69.5%였다.

메리츠종금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터키의 GDP 대비 경상 적자는 5.5%에 이른다.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 외채 비율은 109.2%다. 제이슨 투베이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신흥국 이코노미스트는 “터키 은행이 최근 5년간 달러로 빌린 채무가 60% 이상 증가했다”고 말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에르도안=1954년 출생. 10대 후반에 이슬람주의 정당인 민족구원당 가입했다. 8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출마해 승리했다. 이후 군부 쿠데타 등으로 투옥 등을 거치다 2002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이듬해 총리로 취임했다. 2010년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선거를 간선제에 직선제로 바꾼 뒤 2014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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