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北·中·러 삼각동맹] 下. 다시 소원해지는 북·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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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베이징(北京) 6자회담 이틀째인 지난달 28일 오후. 오전 전체회의에 이어 참가국들의 양자회의가 시작되는 오후 회담장 댜오위타이(釣魚臺) 17호 건물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미국과 북한의 계속된 설전 탓인 듯했다.

북한과 러시아의 개별접촉에서는 러시아 측 수석대표 알렉산드르 로슈코프 외무차관이 먼저 말을 꺼냈다. "미국 입장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좀더 진지하게 고려해 보는 것이 어떨지요. " 순간 북한 수석대표 김영일 외무성 부상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당신은 미국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거짓말쟁이요." 金부상은 배신감을 느낀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로슈코프 차관의 얼굴도 불쾌감으로 달아올랐다. 어색한 분위기는 옆에 있던 중국 측 수석대표 왕이(王毅)외교부 부부장의 중재로 겨우 가라앉았다. 러시아 언론이 전하는 이 장면은 6자회담에 즈음해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한 러.북 관계의 변화를 상징한다.

최근 들어 러시아 외교의 전술적 변화가 감지된다. 북핵 문제 해결에서 북한과 미국 간의 중재자 역할을 강화하는 양상이다. 러시아는 미국에 "북한의 안보 우려를 적극 검토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그동안 보여왔던 '감싸기' 대신 '적극적 설득과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전문가들은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 이후 계속돼 온 러-북 밀월관계의 조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푸틴 대통령이 2000년 크렘린에 입성한 뒤 러.북 관계는 보리스 옐친 정권 때 손상된 관계를 복원하는 수준을 넘어 밀월관계로 발전했다. 2000~2002년 사이 세차례나 이루어진 푸틴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은 이 같은 흐름을 여실히 보여줬다. 양측 유대는 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진 지난해 말 이후에도 변함없는 돈독함을 과시했다. 러시아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면서도 관련 당사국 가운데 가장 앞서 북한을 두둔했다. 북핵 문제의 무력에 의한 해결이나 안보리 회부뿐 아니라 대(對)북한 경제 제재마저 강력히 반대하면서 러시아는 미국의 압박공세에 번번이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지난달 베이징 북핵 6자회담을 앞두고 러시아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보였다. 지난 7월 말 러시아는 북한과 인접한 지역에서 민방위 태세 강화훈련을 했다. 유사시에 대비한 방공시설 점검도 이루어졌다. 러시아의 유력 일간지 이즈베스티야는 군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북한의 핵무기 발사 징후가 포착되면 러시아는 북한의 핵 발사시설을 선제 공격할 것"이란 섬뜩한 기사를 실었다.

8월 중순에는 극동지역과 태평양에서 한국.일본 등이 참가한 대규모 해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에는 선박 나포, 난민 구조 등이 포함됐다. 러시아 당국은 부인했지만 이 훈련이 주로 한반도 전쟁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갑자기 부각시키는 것은 북한에 '간접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전쟁을 피하려면 평양이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경고라는 설명이다. 메시지가 전달됐는지 북한은 당초 이 훈련을 참관하려던 계획을 마지막 순간에 취소해버렸다.

또 로슈코프 차관은 베이징 회담 뒤 "유엔 안보리는 북핵 문제를 논의에 부칠 권리가 있으며 이를 반대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6자회담에서 문제를 해결할 전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당장) 안보리 논의를 말하는 것은 이르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평양에 대한 압박이 읽히는 대목이다.

러시아의 태도변화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위기의식'이다. 북핵 문제가 악화돼 북한이 핵무장에 나서고 이에 미국이 강도높은 대응을 하면서 동북아 지역 전체의 안정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바실리 미헤예프 극동연구소 부소장은 "러시아는 그동안 '동북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북한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논리와 '핵 확산 방지를 위해 북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논리 사이에서 고민해 왔다"며 "최근 들어 후자의 논리에 더 힘이 실리는 추세"라고 밝혔다. 러시아 외무부의 한 고위 관료도 "자기 체제의 안보에만 집착하는 북한의 민족적 이기주의는 동북아의 안정을 원하는 러시아의 지역안보주의와 상충되는 면이 있다"며 "러시아는 북한이 좀더 융통성있게 미국과의 협상에 나서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8일 평양을 방문한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극동연방지구 대통령 전권대표의 역할도 북한을 협상으로 끌어내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북한이 핵 위기 해결에 얼마나 융통성을 보이느냐다. 평양이 지금같이 위기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계속 치달을 경우 러시아로선 중국처럼 미국의 선택을 지지하는 국면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이는 '중재자 러시아'의 역할 종료를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러시아의 고민이 있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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