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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성범죄는 미워도 영화는 미워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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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나원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나원정 대중문화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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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초청작 선정단의 여성·남성 비율을 개선하고, 여성 감독 영화도 더 많이 초청하겠다.”

8일 프랑스 칸에서 개막한 제71회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의 말이다. 전날 그는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자청해 ‘미투 운동’이 촉발한 세계적 변화에 발맞추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올해 최고상을 겨루는 경쟁부문 초청작 21편 중 여성 감독 작품은 3편뿐. 지난 70년간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가져간 여성 감독은 1993년 ‘피아노’의 제인 캠피온이 유일하다. 칸영화제가 “남성중심주의가 전통”이란 비아냥과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을 듣는 이유다.

이날 회견도 개운하진 않았다. 발단은 칸영화제가 ‘사랑’해온 감독 로만 폴란스키. 한 외신기자가 미성년자 성폭행 전력으로 이달 3일 미국 아카데미에서 영구제명된 그에게 칸영화제도 같은 조처를 할지 묻자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복잡한 문제”라고 얼버무렸다. 폴란스키는 77년 성폭행 사건 이후 미국 당국과 형량 협상에 실패해 프랑스에서 40여년간 도피생활 중이다. 칸은 이런 그를 지난해에도 비경쟁 부문에 초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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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히틀러에 대한 우호적 발언이 문제가 된 후 7년 만에 칸에 복귀하는 덴마크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도 있다. 그와 2000년 ‘어둠 속의 댄서’를 찍었던 가수 겸 배우 뷔요크는 지난해 자신의 SNS에 과거 덴마크 감독과 영화 촬영 중 수차례 성추행 시도로 고통받았다며 폰 트리에를 암시했다. 감독은 이를 부인했지만 의혹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초청한 칸영화제는 올 초 아카데미 시상식과 대조적이다. 아카데미는 앞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은 제임스 프랭코가 수상 직후 성추문 논란에 휩싸이자 후보에도 올리지 않았다.

올해 칸영화제는 성범죄 신고 전용 핫라인까지 신설했다. 미투 운동의 계기가 된 할리우드 제작자 와인스타인이 그간 칸에서만 4건의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가 공개된 여파다. 하지만 부적절한 ‘거장 감싸기’는 이런 노력을 무색하게 한다.

그럼에도 변화의 희망은 보인다. 올해 심사위원단은 보기 드물게 전체 9명 중 여성이 5명으로 과반을 이뤘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진정한 변화는 구체적 행동에서 나온다”며 오는 12일 칸에서 열릴 여성 100인 레드카펫 행진에도 앞장설 예정이다. 블란쳇은 심사에선 성별·인종·정치적 공정을 지키겠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칸에서>

나원정 대중문화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