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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탈북 지식인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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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탈북민·정치학 박사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탈북민·정치학 박사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북에서 남으로 온 우리 3만 탈북민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반드시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하고 한반도에 진정한 봄이 오리라 믿고 싶습니다. 지난 4월 27일 탈북민은 판문점 군사분계선(MDL)을 넘는 당신을 보며 뭉클했습니다. 당신은 세인들의 관심을 받으며 붉은 카펫 위에서 대한민국 국군 의장대를 사열했습니다. 3만 탈북민 중에 누구 하나 목숨 걸지 않고 이 땅에 온 이가 없습니다. 비무장지대(DMZ)의 지뢰밭을 목숨 걸고 돌파했고, 총구가 도사린 삼엄한 북·중 국경과 제3국의 사막·정글을 넘어 여기 자유의 땅 대한민국에 뿌리내렸습니다.

어제까지 사회주의 낙오자였던 #우리 3만 탈북민은 오늘 #자본주의 선구자로서 #통일의 순간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어떤 탈북민은 당신의 판문점 통과를 두고 “70년 탈북 역사상 가장 화려한 탈북”이라고 표현했고, 또 어떤 탈북민은 “당·정부·군대의 수장들을 모두 이끌고 내려온 김 위원장이 그대로 대한민국에 눌러앉으면 그 순간부터 평화통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은 우리 3만 탈북민에게 여전히 ‘모국’이지만 진정한 우리 ‘조국’은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 중에 당신은 실향민, 연평도 주민, 나를 포함한 우리 탈북민을 ‘분단의 희생자 중 한 계층’으로 언급했습니다.

당신이 문재인 대통령을 믿고, 나아가 대한민국을 신뢰하고 역사적 걸음을 내디딘 데 대해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 탈북민은 ‘평창의 나비효과’에 힘입어 이제 북한도 변화의 대열에 동참할 것 같은 좋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3대 세습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군부를 비롯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지배권을 확보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변혁의 길을 가고자 ‘단번 도약’에 나섰는데, 이에 반발할 사람은 많지 않다고 봅니다.

돌이켜 보면 대량 탈북의 원인이 된 ‘고난의 행군’은 모두 선대의 과오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이제 선대와 서서히 연을 자르면서 개혁·개방의 길로 당당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중국의 선례를 보세요.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대해 ‘공7 과3’(공적이 7할, 과오는 3할)이라고 평가하고 단호하게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오늘날 미국과 나란히 주요 2개국(G2)으로 도약했습니다. 당신이 규정해야 할 선대(김일성·김정일)의 ‘세 가지 과오’를 언급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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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들은 개인숭배로 인민 대중의 자유와 인권을 혹독하게 탄압했습니다. 둘째, 무모하게 핵무기 개발에 몰두해 인민이 먹고사는 문제인 인민 경제를 황폐화했습니다. 셋째, 북한을 외부 세계와 차단해 고립무원의 후진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흔히 부친 김정일 위원장이 말한 ‘우리식 사회주의’를 제때 버렸으면 오늘의 ‘인간 생지옥’ 북한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당신의 변혁 의지에 반발할 자가 누구입니까. 핵무기에 집착해온 군부 강경파도 잘 정리됐다고 외부 세계는 분석합니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 진실의 순간은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저하지 마세요.

‘가난은 국가도 못 이긴다’는 말은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북한 땅에 중국식 또는 베트남식 개혁·개방 정책만 도입하면 얼마든지 가난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핵무기를 버리길 바랍니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에서 당신이 핵무기 포기를 선언한다면 70억 인류의 뜨거운 박수를 받고 21세기 가장 유명한 리더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아마도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그리고 김 위원장은 누가 봐도 유력한 올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핵무기에 계속 집착한다면 당신의 운명은 담보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먼저 자유를 찾은 우리 3만 탈북민은 고통받는 2500만 북한 주민의 선구자로서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 북한의 수용소를 과감하게 해체하고 모든 수용자를 가족과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둘째, 이산의 한을 안고 살아가는 납북자·국군포로를 모두 풀어주기 바랍니다. 셋째, 판문점 가까운 지역에 이산가족 면회소를 설치해 혈육상봉을 애타게 기다리는 1000만 이산가족의 70년 묵은 한을 풀어주세요.

우리 탈북민은 어제까지 ‘사회주의 낙오자’였지만 오늘은 ‘자본주의 선구자’로서 통일의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공산화 통일과정에서 조국을 떠났던 많은 사람이 ‘달러 보따리’를 들고 귀국해 시장경제 발전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3만 탈북민에게도 그런 기회가 오길 간절히 바랍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을 만날 때 반드시 ‘탈북자’를 언급할 것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큰 성과를 고대합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탈북민·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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