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칼럼

새 한은 총재의 강점과 약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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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즘 인사 발표가 나면 실망과 한탄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 보통인데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모처럼 될 만한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사 기준이 턱없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능력도 있고 도덕성도 있고 전력도 깨끗하고 그 위에 코드가 맞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일을 잘할 적임자가 아니라 흠이 없는 무난한 사람이 뽑히는 것이다.

한은 총재는 많은 사람이 탐을 내는 자리다. 부총리 등 관직이나 다른 좋은 자리를 하다 말년을 장식하기 꼭 좋은 자리라고 생각한다. 가문의 영광이 될 명예로운 자리인 데다 바람을 덜 타고 4년의 임기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재 자리가 빈다 하면 많은 사람이 염치없이 달려들고 이번에도 그랬다 한다.

원론적으로 중앙은행 총재는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니다. 전문지식뿐 아니라 소신과 인격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옛 한은법엔 "총재는 고결한 인격과 금융에 관한 탁월한 경험을 가진 자 중에서…"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 조항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다고 본다. 이 총재가 지난 40여 년 동안 한은의 주요 자리를 거치면서 소신 있게 일해 왔다는 점에서 적어도 무임승차는 아닌 것 같다. 고결한 인격은 높아지면서 변하는 걸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앞으로 관심거리다.

인사엔 강점과 약점이 있게 마련이다. 이번 선임 과정에서 약점이 됐다는 부산상고를 나와 대통령이 잘 알고 있다는 부분은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다. 한은 총재는 여러 경제주체와 다양한 통로를 갖고 상황을 바르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대통령과 통로를 갖고 또 하나의 정책소스가 돼야 하는데 이제까진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정책 결정은 물론 인사에서도 그랬다. 대통령과 중앙은행 총재가 서로 잘 이해하고 존중해야 금융정책이 잘될 수 있다.

국민의 정부 출범 때 한은 총재 자리를 고사한 당시 정운찬 서울대 교수는 대통령이 어떤 정책을 펼지, 또 중앙은행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잘 모르는데 어떻게 그 막중한 자리를 맡느냐고 말한 바 있다. 그동안 대통령이나 총재나 중앙은행의 막중한 책임에 대한 콘센서스나 접근 노력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중앙은행의 왜소화로 연결돼 많은 불행을 낳았다. 근년 들어서만도 벤처 육성을 위한 금융의 집중지원, 카드 남발 사태 등에서 중앙은행이 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요즘의 과잉유동성과 부동산 급등 사태도 마찬가지다. 금리와 환율정책에 타이밍을 많이 놓쳐 일을 크게 만든 점도 있다. 정상적인 중앙은행 총재라면 미리 경고하거나 발 벗고 나섰어야 할 일을 몰랐거나 가만있었던 것이다. 사태를 경시했거나 총재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정말 필요할 때 꼭 한마디 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평소 말을 아껴야 한다. 그래서 탁월한 경험을 가진 새 총재에게 기대가 큰 것이다.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대통령에게 요즘의 부동산 문제를 비롯해 경제상황만 정확히 전달할 수 있어도 큰 성공이다. 앞으로 지방선거와 대선 등 금융에 대한 압력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므로 더 잦은 설득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제까지 중앙은행이 너무 밀리다 보니 자포자기가 많았다. 쓴소리는 퇴임할 무렵에 가서나 한마디 하는데 그 방법보다는 평소 꾸준히 설득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중앙은행의 관점만 고집해 정부하고 정면으로 부닥쳐 장렬히 전사하는 것도 효과적이 아니다. 말로써 한은 독립을 외치기보다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는 전략과 수완이 더 중요한 것이다. 정부의 입장을 너무 알아서 총재의 일을 잊어서도 안 되지만 한은 출신이란 입장 때문에 경직되거나 조화를 잊어서도 곤란하다. 매우 어렵고 전략적 판단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고고함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정통 한은 사람으로서 원칙주의자로 알려진 새 총재에게 걱정되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당초의 약점이 강점이 될 수 있고 강점이 약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최우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