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4명.
국내에서 지난 2012년부터 5년간 길을 가다가 자동차에 치여 숨진 보행자 숫자입니다. 인구 10만명당 3.5명 수준인데요. 이 수치는 2015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서 상당히 나쁜 수준입니다. 우리보다 심한 나라는 칠레(4.1명) 정도뿐이니까요. 참고로 OECD 회원국 평균은 10만명당 1.1명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수치가 있습니다. 같은 기간(2012~2016년) 승용차 간(차대 차)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인데요. 사고가 모두 81만 1372건 발생해 9703명이 숨졌습니다. 사고 100건당 1.2명이 사망한 건데요.
반면 자동차와 보행자 간(차대 사람) 사고로 인한 치사율은 3.68%로 3배가 넘습니다. 사고는 24만 9025건으로 차대 차 사고보다 훨씬 적지만 사망자 수는 9174명으로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높은 치사율의 원인으로 도심부의 차량 속도에 주목합니다. 우리나라 도심부의 제한속도는 시속 80㎞로 설정된 일부 자동차전용도로를 제외하곤 대부분 시속 60㎞인데요. 반면 주요 선진국은 시속 50㎞ 이하로 우리보다 낮습니다.
얼핏 시속 10㎞ 정도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싶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3월 한국교통안전공단에서 실시한 '속도별 자동차 대 보행자 인체모형 충돌 시험' 결과를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시험은 보행자 교통사고 때 자동차 속도에 따른 보행자의 상해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각각 시속 60㎞, 50㎞, 30㎞로 달리는 자동차가 인체모형과 부딪힐 때 발생하는 상해치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요. 보행자가 시속 60㎞로 달리는 차량과 충돌했을 경우 중상을 입을 가능성은 92.6%였습니다. 다리 등 하체도 큰 타격을 입지만 특히 머리에 충격이 집중됐고, 사망확률이 80% 이상으로 예측됐습니다.
반면 시속 50㎞인 차량과 부딪히는 상황에서는 중상 가능성이 72.7%로 시속 60㎞일 때와 비교해 20%p나 낮아졌습니다. 속도를 10㎞만 줄여도 그만큼 보행자 보호 효과가 올라간다는 의미인데요. 특히 어린이 보호구역이나 노인 보호구역 등의 제한 속도인 시속 30㎞ 이하로 달리는 차량과 보행자의 충돌사고 때 중상 가능성은 15.4%로 더 크게 떨어졌습니다.
공단 관계자는 “충돌속도가 높아질수록 보행자의 머리가 자동차 후드나 앞면 유리와 2차로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특히 시속 60㎞ 상황에서는 머리가 차량의 앞 유리를 거의 뚫고 들어갈 정도로 강한 충격이 가해진다”고 설명하더군요.
일부 시민들 사이에서는 “도심에서는 차가 막혀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는데 제한속도 하향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응도 나오지만, 교통량이 적어 속도를 내는 새벽과 야간 시간대의 사망자가 훨씬 많은 게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는 내년부터 도심지역의 제한속도를 시속 50㎞로 낮추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택가나 어린이ㆍ노인 보호구역 등은 도로 여건에 따라 시속 10~20㎞ 이하로 제한 속도가 더 강화될 예정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을 개정하겠다는 건데요. 우리에 앞서 도심제한속도를 시속 60㎞에서 50㎞로 줄인 덴마크와 독일은 사망사고와 교통사고가 20% 넘게 줄어드는 효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택시와 버스 업계에서 이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버스업계는 우선 제한속도가 줄어들면 그만큼 정류장 간 이동 시간이 길어져 정시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승객 불편이 우려된다고 말합니다. 대체로 소통이 원활한 버스전용차로에서도 종전보다 느리게 운행해야 하기 때문인데요. 이에 따라 대중교통으로서 버스의 공공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동일 구간의 운행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수입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도 우려합니다.
택시업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한속도가 줄어들면 그만큼 동일 거리를 운행할 때 시간이 더 걸리는 탓에 영업에 적지 않은 지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얼마 전 열린 도심제한속도 하향 관련 공청회에서도 택시 관계자들이 반대 의견을 밝힌 바 있습니다.
또 일부 전문가들은 제한속도를 낮출 경우 도심 내 이동시간이 전반적으로 더 길어지게 돼 도시 경쟁력의 주요 요소 중 하나인 '이동성(mobility)'이 하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합니다.
이처럼 반대 논리도 각기 처한 위치에 따라 어느 정도 타당성이 인정됩니다. 하지만 도심제한속도를 낮추는 일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소중한 생명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는 노력이라 더 미루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다만 내년부터 시행하더라도 일시에 모든 지역으로 확대하기보다는 도심 중앙부터 순차적으로 적용하는 등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적응 기간을 두는 정책적 고려가 필요해 보입니다. 또 자동차 운전자에게만 책임을 떠넘길 것이 아니라 보행자의 안전 의무에 대한 교육도 보다 강화해야 합니다. 무단횡단 등으로 인한 사고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다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안전 정책 시행으로 소중한 생명을 더 많이 살릴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