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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행동 vs CVID…북·미 담판, 비핵화 시한에 달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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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9호 29면

[오영환의 외교노트] 6자회담 실패의 교훈

2005년 9월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9·19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악수를 나누며 웃고 있다. 결과적으로 합의는 깨졌다. 왼쪽부터 크리스토퍼 힐(미국), 사사에 겐이치로(일본), 우다웨이(중국), 송민순(한국), 김계관(북한),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러시아) 수석대표. [중앙포토]

2005년 9월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9·19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악수를 나누며 웃고 있다. 결과적으로 합의는 깨졌다. 왼쪽부터 크리스토퍼 힐(미국), 사사에 겐이치로(일본), 우다웨이(중국), 송민순(한국), 김계관(북한),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러시아) 수석대표. [중앙포토]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비핵화 방안이 무성하다. 북한 입장은 선명해졌다. 크게 두 가지 원칙을 내놓았다. 하나는 지난달 초 한국 특사단에 밝힌 대북 군사 위협 해소와 체제보장의 조건부 비핵화다. 미국이 요구하는 선(先) 핵 폐기는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합의 이행 방식이다. 지난달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중, 이번 주 이용호 외무상의 방러를 통해 북·미 간 ‘단계적·동시적 조치’를 공식화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에 공감을 표시했다. 라브로프는 10일 기자회견에서 “협의의 진전은 단계적이어야 하고, (대북) 안전보장은 철근 콘크리트처럼 강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단계적·동시적 접근에 대한 중·러의 지지를 확보한 것은 대미 협상의 보험용으로 보인다. 동시에 북·미 정상회담 후의 비핵화 논의를 다자 차원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중·러는 북한에 보호막을 쳐주고 비핵화 과정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를 갖게 됐다.

6자회담 때부터 북·미 원칙 충돌 #2005년 ‘검증 가능한 비핵화’ 합의 #마감 안 둬 북한에 시간만 벌어줘 #포괄 합의 단계적 이행 시점 정하면 #북한 아닌 국제 사회가 시간 주도권

북한 입장은 결국 자신의 우려·관심 사항과 비핵화를 단계적·동시적으로 취해나가자는 것이다. 북·미가 서로 포괄적 공약을 하고, 상호 행동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동시 병행적 접근은 북한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다. 북한이 한 달 새 비핵화 의제와 방식을 모두 제시한 것은 기선 잡기의 일환으로 보인다. 의제 선점(先占)은 지난 20여 년간 북한 협상술의 최대 특징이다.

리비아 핵 포기 이끈 볼턴, 속전속결 주장

미국도 하나의 철칙(鐵則)을 갖고 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다. 과거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유럽 핵 폐기 때 적용한 원칙이다. 마크 내퍼 주한 대리대사는 2일 북·미가 만나는 목적은 CVID 때문이라고 말했다. CVID는 비핵화로 가는 방법이자 목표다. 미국은 2016년 2월 대북 제재 강화법에 이를 명시했다. CVID는 국제 사회의 목표이기도 하다. 2006년 이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대북 제재 결의에 들어갔다. 미국이 이를 바탕으로 북한의 선 핵 포기 후 보상 구도의 리비아 해법을 고집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 지명자는 일단 북한이 영구적 비핵화를 달성하기 전까지 보상은 없다고 12일 말했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비핵화의 본론에 빨리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북한이 단계적 접근으로 지연전술을 펼 수 있는 만큼 속전속결식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북·미 간 전초전은 이미 시작됐다.

현재의 북·미 입장은 2000년대 중반 6자회담 초기를 연상시킨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2003년 5월 이래 북한 핵의 CVID를 공식 목표로 삼았다. 당시의 D는 비핵화(denuclearization)가 아닌 해체(dismantlement)였다. 비핵화가 포괄적인데 반해 해체는 구체적이고 물리적 의미가 강하다. 미국은 그해 8월 1차 6자회담에서 CVID를 4번, 이듬해 2월 2차 회담에서 14번이나 언급했다. CVID 주장의 중심축은 딕 체니 부통령이었다. 그를 존 볼턴 당시 국제안보·군축 담당 국무부 차관과 루이스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떠받쳤다. 군축 전문가인 로버트 조지프 백악관 비확산 국장도 한몫했다. 조지프은 2003년 리비아 핵 포기 비밀 협상 때 미국 수석대표였다.

북한은 1차 회담에서 CVID에 맞서 동시 행동의 일괄 타결을 주장했다. 북핵 사찰과 폐기,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 및 외교관계 수립 등을 동시에 순서대로 밟아나가자고 했다. 김영일 외무성 부상의 발언은 북한식다웠다. “네가 먼저 한 발짝 움직이면 나도 한 발짝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너 한 발짝 나 한 발짝 같이 움직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1차 회담은 공동발표문을 내지 못했다. 미국의 선 핵 폐기와 북한의 동시 행동 간 간극은 컸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의장국 요약에서 “모든 참가국은 원칙적으로 단계적, 동시 또는 병행 실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단계적, 동시 병행’은 김정은이 지난달 시진핑에 밝힌 것과 사실상 같은 내용이다. 김정은 발언은 향후 비핵화 논의 과정에서 북·중 간 연대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마침 왕이 중국 외교부장 겸 국무위원은 6자회담의 산증인이다. 북한식 해법의 궁극적 승자는 중국일 수도 있다. 북한이 비핵화하면 동북아에서 중국의 핵무기 독점이 유지된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의 규모가 줄고 성격이 바뀔 수밖에 없다. 서해를 사이에 둔 주한미군과 최첨단 무기체계는 중국에 눈엣가시다. 에번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수석 부차관보는 “최근 몇 년간 북·중 간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베이징과 평양은 미국의 ‘위협’에 대해선 전략적 동지(strategic bedmates)”라고 말했다(뉴스위크 기고).

북한 비핵화 방식에 대한 6자회담 결과

북한 비핵화 방식에 대한 6자회담 결과

9·19 공동성명 핵시설 불능화 단계서 파탄

북한은 1차 회담 이후 논리를 정교화했다. 2차 6자회담에서 ‘말 대 말’의 공약과 ‘행동 대 행동’을 공식 제기했다. 적대 관계 국가끼리는 말의 공약으로는 서로 신뢰할 수 없는 만큼 동시 행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CVID는 패전국에 대한 용어다. 우리는 패전국이 아니다”고 반발했다. 리비아식 핵 포기 제안에 대해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결국 2004년 6월 3차 회담 의장성명에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필요성이 강조됐고,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엔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이 원칙으로 들어갔다. ‘말’이 ‘공약’으로 바뀐 것은 미국 측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CVID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9·19 공동성명에 ‘검증 가능한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 포기’로 표현됐다. 이후 북한의 핵 동결과 관계국 보상의 초기 단계 조치는 이뤄졌지만, 핵시설 불능화(disablement) 단계에서 합의는 파탄났다.

최근 북한 비핵화 관련 각국 입장

◆ 2017년 7월 6일 문재인 대통령, 독일 쾨르버재단 연설 “북한 체제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 단계적·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
◆ 2018년 3월 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남한 특사단에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 핵을 보유할 이유 없다.”
◆ 2018년 3월 25일 존 볼턴 미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 “북한 비핵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좋다.”
◆ 2018년 3월 26일 김정은, 북·중 정상회담 “한·미가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조치를 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 2018년 4월 2일 마크 내퍼 주한 미국 대사대리,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지만 만나는 목적은 바로 CVID가 필요하고 이것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 2018년 4월 3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 “포괄적이고 단계적 방식으로 타결한다는 큰 방향 외에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다.”
◆ 2018년 4월 10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협의의 진전은 단계적으로, 대북 안전보장은 철근콘크리트처럼 강고해야 한다."

2~3년 뒤 협상 되돌아보는 관점서 접근을

그 새 미국은 부시 공화당 행정부에서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로 바뀌었다. 대북 정책은 한동안 실종됐다. 중국은 북한 비핵화보다 지정학적 이해를 우선했다. 한·일은 지렛대가 없었다. 결국 시간은 북한 편이었다. 북한은 지난해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CVID 대 ‘행동 대 행동’의 1라운드 대결은 북한의 완승으로 끝난 셈이다. 기한을 두지 않은 단계적·동시적 접근이 6자회담의 실패의 본질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북핵 폐기의 시한을 둬야 한다는 국내외 주장은 당시의 반성 때문으로 보인다. 핵 폐기 시한 설정은 김정은의 비핵화 결단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과거 협상의 교훈이 주는 해법은 ‘CVID+행동 대 행동+시한’일 수 있다. 미국과 북한이 되뇌는 경문(經文)을 합치고, 이행이 끝나는 시점을 못 박아 시간을 국제사회 편으로 되돌리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북·미 정상회담 후 후속 협의가 다자 차원으로 진행될 경우 각국 대표의 급(級)이다. 정상의 전권을 위임받은 인사로 채워져야 한다. 각국 대표가 외무장관이든 국가안보보좌관이든 그래야 회담에 속도가 난다. 외무 차관보급이 수석대표인 6자회담은 본국 훈령을 받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였다. 미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내 강온파 간 대립으로 훈령이 죽도 밥도 아닌 경우가 적잖았다.

북한의 돌발적 요구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과거 20여 년간 북핵 협상에 미뤄보면 북한이 경수로로 상징되는 평화의 핵까지 포기할 가능성은 작다. 북한이 2010년 착공한 영변의 실험용 경수로 가동에 최근 박차를 가하는 것은 이와 맞물린 듯하다. 경수로는 김일성의 유훈이기도 하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핵 합의의 요체는 경수로 제공과 핵시설 동결의 맞교환이었다.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 ‘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권리 보유’와 ‘경수로 제공 문제 논의’가 들어간 것도 북한의 집착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인공위성 발사를 요구할 가능성이다. 김정일은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 때 미국이 인공위성 발사를 대신해주면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중지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인공위성은 김정일의 숙원이다. 김정은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중단이나 폐기 조건으로 위성 카드를 꺼내 들지 모른다.

한국은 북한 비핵화 해법의 당사자다. 동시에 중매역이자 촉진자(facilitator)이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는 역할이다. 6자회담 과정에서도 그랬다. 요체는 과정이 아닌 결과물이다. 단기적 외교 성과보다는 2~3년 뒤 현재의 협상을 되돌아보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자세가 긴요하다. 임기가 있는 정권이 종신 정권을 상대하는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오영환 군사안보연구소 부소장·논설위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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