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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 규칙 만들던 미국…이젠 규칙 깨는 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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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9호 30면

[책 속으로] '경제규칙 바꿔야 한다'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스티글리츠 교수

경제 규칙 다시 쓰기

경제 규칙 다시 쓰기

경제 규칙 다시 쓰기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김홍식 옮김, 열린책들

세계화보다는 세계화 관리가 문제 #친기업 규칙이 불평등 악화 원인 #성장 과실 공유한 스웨덴 배워야 #나라마다 자신에 맞는 방식 달라 #경제 규칙은 민주 토론의 산물 #교과서도 변화 맞춰 바뀌어야 #한국의 한미FTA 대처는 잘못 #세계 중앙은행들 한국 대처에 당혹 #한국 정부 중간층 중시정책은 훌륭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하지만 신분제가 폐지된 자유로운 사회에서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미국의 꿈은 세계 도처에서 흔들리고 있다. 전 세계에 문제 해결 솔루션을 제공하던 미국이 이제는 그 자체가 문제의 원천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부익부 빈익빈은 세계화를 선택한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침몰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석좌교수(75)의 2016년 저서 경제 규칙 다시 쓰기(Rewriting the Rules of the American Economy)가 최근 우리말로 번역됐다. 책의 영어판 부제는 ‘성장과 번영의 공유를 위한 어젠다(An Agenda for Growth and Shared Prosperity)’이다. 그는 지난 35년간의 미국 경제 정책이 잘못됐다며 상위 1%를 위한 경제 규칙을 수정해야 불평등 해소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베스트셀러 경제학 교과서의 저자이기도 한 스티글리츠 교수는 불평등은 필연이 아니라 경제 정책과 규칙을 수정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선택’ 사항이라고 본다. 책의 첫 절반은 미국 내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진단한다. 나머지 절반은 중도적 개혁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불평등, 지속가능한 성장, 세계화 등의 주제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가다.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미국의 스티글리츠 교수는 최상위층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힘을 억제하고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포토]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미국의 스티글리츠 교수는 최상위층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힘을 억제하고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포토]

정면충돌은 피한 것 같지만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격화될 가능성이 여전한 것 같다.
“전면적인 무역 전쟁은 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전쟁은 평화적 해결에 비해 당사자들에게 더 큰 대가를 요구한다. 무역 전쟁은 비합리적이다. 양측 모두 패배한다. 미국과 중국 모두 확전을 피해야 자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
경제 규칙 다시 쓰기는 미국의 지난 대선 때 힐러리 클린턴을 염두에 두고 쓴 책으로 알고 있다. 다음 대선에서도 조명받을 거라고 보나.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선 이후 많은 미국인들의 경제 상황이 악화됐다. 특히 미국 공화당이 새로 쓴 경제 규칙은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약화시키고 기업의 시장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는 불평등이었다.”
단순히 경제규칙으로 어쩔 수 없는 세계화의 결과 아닌가.
“세계화가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세계화 관리 방식이 문제였다. 예컨대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는 대외 개방도가 매우 높다. 하지만 이들 나라는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겪지 않는다. 경제 규칙이 다르기 때문이다. 스웨덴 등은 세계화로 불리해지는 사람들을 돕는 정책을 폈다. 세계화의 과실을 노동자들과 나눴다. 반면 미국 공화당은 세계화에 따른 무역 개방으로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돕는 데 반대했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교섭력 약화를 즐기는 것 같았다. 노동자들의 소득도 빼앗았다. 경제규칙에는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다. 미국은 나쁜 규칙을 선택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미국이 대폭 수용하면 어떤가.
“대다수 시민이 승자가 되는 시장경제를 이루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길만 있는 게 아니다. 모든 나라가 나름의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경제 규칙 다시 쓰기가 말하고자 한 것은 미국이 덴마크·스웨덴·핀란드·노르웨이를 그대로 모방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미국이 이들 국가로부터 무언가 배울 필요는 있다. 가령 경제 성장으로 인한 번영을 어떻게 공유했는지 배워야 한다.”
바람직한 시장경제를 가꾸는 방식이 다양하더라도 공통분모는 있지 않을까.
“경쟁적인 시장,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금융시장, 사회적 보호, 강한 교육제도, 의료제도가 필요하다. 책에서 나는 좋은 규칙의 요소를 말했을 뿐 특정 정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정책은 민주주의적인 토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북유럽 모델을 다른 나라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미국과 달리 노르딕 국가들은 동질적(homogeneous)이며 국가 사이즈가 아주 작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과 달리 스웨덴은 이민자 인구가 17%에 이른다. 좋은 정책은 국가 규모와 무관하다. 작은 나라에 좋은 교육제도는 큰 나라에서도 좋은 교육제도다.”
경제 규칙 다시 쓰기는 미국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다른 나라 버전은 안나오나.
“이미 한국 경제 규칙 다시 쓰기유럽 경제 규칙 다시 쓰기 출간을 위한 작업을 한국과 유럽 학자들이 진행 중이다.”
경제 규칙만이 아니라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럴 필요가 있다. 경제학 원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경제학에 불변의 진리는 없다. 경제학 교과서도 세상 변화에 따라 수정돼야 한다.”
한국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을 평가한다면.
“면밀하게 모니터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간 소득 계층을 경제성장의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나 한국 경제를 보다 혁신적으로 만들겠다는 아이디어 등 기본적인 생각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한미 FTA 개정 협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이 미국의 개정 요구를 받아준 것은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는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어떤 나라도 일방적으로 다른 나라에 규제 완화나 규제 철폐를 요구할 수는 없다. 한국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자동차에 관한 안전·환경 규제를 완화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면 분노했을 것이다. 중앙은행의 투명성을 협상 대상으로 삼은 것도 문제다.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 담당자들이 한국의 대처에 대해 크게 당혹해 하고 있다.”
미국은 패권 국가로서 세계 경제의 규칙을 써왔지 않나.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트럼프 시대 미국은 규칙을 만드는 게 아니라 깨고 있다. 미국은 지도력을 상실했으며 지도력 복원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세계 경제 규칙은 집단적으로 마련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한국의 경제정책 입안자들에게 강조할 게 있다면.
“미국은 친기업 규칙을 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줬다. 다른 나라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을 예시했다. 1%가 아니라 1%의 1%(0.01%)가 대부분의 성장 과실을 가져가는 상황은 경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위협이다. 기업의 이익을 중심으로 규칙을 쓰면 번영의 공유, 빠른 성장, 민주적인 시장경제가 구현될 수 없다.”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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