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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희씨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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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달 초까지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을 지냈던 좌승희 박사에게는 별칭이 많다. 시장경제 전도사는 그나마 점잖은 표현이다. '재계의 입'이라든가 '가진 자만 옹호하는 보수 꼴통'이라는 비난도 적지 않다. 대기업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연구기관의 장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물러났다. 스스로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얘기하니 '갑자기'가 맞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재계와 경제 분야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선 그 배경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8년이나 원장을 했으니 물러날 때가 됐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재계 일각에선 다른 얘기가 많이 나돈다. 지난 2월 연임한 강신호 전경련 회장이 평소 좌 박사를 불편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부 정책에 대해 연일 목소리를 높이자 강 회장은 측근들에게 "공연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며 여러 차례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전경련의 대주주 격인 4대 그룹도 좌 박사를 변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 회장이 이들 그룹 구조조정본부장들에게 좌 박사의 경질 의사를 밝히자 이들은 "강 회장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한 그룹의 고위 관계자는 "우리는 이번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면서도 "대놓고 정부를 공격하면 기업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재계가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을 부담스러워했고, 그 결과가 경질로 나타났다는 얘기다.

좌 박사는 자신은 재계의 대변자가 아니며 나라 경제를 걱정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결과적으로 재계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세상을 차별화.수직적 세계관.사다리 오르기 경쟁 등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한다. 이것으로 지금의 경제 위기를 진단하고, 정부 정책을 해석하며,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전망한다.

그는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일 등 선진국이 도약했을 때도, 한국이 1960년대부터 20년간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도, 지금 중국이 고속 성장하는 것도 모두 정부가 차별화 정책을 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평등주의로 나가면 결코 경제가 성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기업과 부자의 구미에 딱 맞는 얘기들이다. 지금의 강자가 앞으로 더욱 강자가 될 수 있도록 정부가 정책을 펴야 한다는데 싫어할 대기업이 어디 있을까.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업들이 더 잘하기 위해 다른 기업에 출자하는 것을 가로막는 출자 규제와 은행업 진출을 제한하는 정책은 잘못됐다고 비판한다. 상속 문제에 대해서도 "부모 탓을 하면서 노력은 하지 않고 잘사는 사람의 뒷다리만 잡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재계 스스로 부담스러워 내쳤다는 얘기가 사실이라면 이는 재계 스스로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 않아도 재계는 '자기 편'을 홀대한다는 얘기가 많다. 재계에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재계 편을 들지 말고 오히려 강하게 비난하라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않다. 유명 프로야구 선수 두 명을 스카우트하는 데 100억원 이상을 쓰면서도,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인프라 구축에는 돈을 아낀다는 비판도 있다. 재계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만 관심 있을 뿐 장기적인 이익엔 무관심하다는 지적이다. 좌 박사의 경질이 장차 재계 스스로 자기 편을 내모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논리의 비약일까.

김영욱 경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