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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평생 가슴에 썼다가 토해 낸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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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시인 정철훈(47)이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민음사)를 발표했다. 그에겐 첫 소설이다. "언제 썼느냐" 물었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평생"이라고 답한다. 소설을 읽고나서야 진심이란 걸 알았다. 시인은 쉰 해 가까이 가슴 저 편에 쟁여두었던 가족사를 원고지 1100여 장에 풀어놓았다.

그는 월북자 가족이었다. 북으로 간 아버지가 문학적 모티브가 됐던 이문열의 경우처럼, 그에겐 월북한 큰아버지가 셋이나 있었다. 집안에 월북자가 있으면 안다. '빨갱이' 집안의 설움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그도 철부지였을 땐 몰랐다. 새벽에 도망치듯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했던 까닭을, 북녘 하늘 올려다보며 새벽마다 치성드렸던 할머니 속내를, 친척 어르신들이 목소리 낮추고 꺼내던 이름이 큰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빨갱이 아비'를 둔 이 땅의 다른 아들들처럼, 집안 어른과 술상 마주할 나이가 되어서야 그도 알 수 있었다. 쉬쉬했던 내막, 들을 수 있었다.

월북했던 삼 형제 중에 둘째 한추민이 카자흐스탄에 살아있었다. 우연히 연락이 닿아 그는 50년 만에 고향땅을 밟는다. 이때부터 소설은, 한추민이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던 1950년대로 건너뛴다. 그리고 소설은 여태의 분단문학이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를 건드린다. 기존의 분단문학은 '빨갱이 아비'의 신념으로 인해 남녘의 가족이 겪었던 고통의 세월을 말했다. 이 소설도 여기까지는 같다. 그러나 한추민이 모스크바에서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카자흐스탄으로 망명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이 일로 북녘의 두 형제는 박해를 받는다. 삼 형제 중 막내는 함경남도 단천시 검덕광산에서 끝내 총살당한다. 고향에 남은 가족과 북으로 간 형제의 삶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가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소설은 분단과 이산의 민족사를 한 평쯤 넓혀 놓았다.

작가의 옛 시집을 꺼내들었다. 무심코 넘겼던 시구가 돌부리가 되어 걸린다. '난파선 같은 월북자 가족의 집에서 어머니는 빈 뒤주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고'('사나운 잠'부분). 작가는 어디까지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말을 삼갔다. 굳이 캐묻지도 않았다. 소설 속 이야기가 모두 그의 사연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누구나 소설 한 권쯤 가슴에 안고 산다. 그러나 꺼내어 내려놓는 건 다른 일이다. 켜켜이 쌓였던 응어리, 이제는 조금 가셨는지.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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