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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北·中·러 삼각동맹] 上. 변해가는 중국의 대북 인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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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북한핵 문제는 전통적으로 북한에 우호적이었던 중국과 러시아에 미묘한 상황을 제공하고 있다. 북한은 50여년 혈맹 중국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어진 나라'로, 러시아에는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것이다. 북한핵을 계기로 변화되는 북.중, 북.러 관계를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지난 8월 중국 고위층에는 의미심장한 기사가 실린 한 부의 '내참(內參:내부 참고)문건'이 돌았다. 표지엔 '지도자용, 외부 배포 금지'라는 경고가 쓰여 있었다.

이 문건에 실린 글의 제목은 '한반도 위기에서의 중국의 핵심 역할'. 중국의 "대북한 정책이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은 '중국의 경제건설과 대만 통일을 위해 궁극적으로 북한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한 마지막 파트다.

북핵 문제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져 중국이 6.25 당시의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한다)'원칙에 따라 개입하게 되면 중국은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보고 미국과 적이 되면서 대만 통일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북.중혈맹' 논리에 따른 밀월기는 지난 세기인 1990년대에 끝났다고 단정했고 경제를 모르는 북한 지도부 때문에 탈북자가 대량 발생해 중국에 피해를 주고 있는 점, 북한이 중국 원조에 기대고 있어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점을 양국 관계 악화 요인으로 꼽았다.

중국이 그렇게 개혁.개방을 권해도 북 지도부가 요지부동이고, 최근엔 북한 내 중국 정보망을 북한이 마구 깨뜨리고 있는 점도 불만으로 꼽혔다.

이 글이 주목받는 이유는 '내참'이 당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제작되고 당정 내부에 제한 배포되는 문건이기 때문이다. 중국 상층부의 기류를 반영하며 향후 방향을 시사한다는 의미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은 북한에 대한 중국 내 인식의 변화, 혈맹 관계가 서먹서먹한 이웃으로 희석돼 가는 변화를 반영한다.

중국의 대북 인식 변화는 날로 뚜렷해져 가고 있다. 올해 초 후진타오(胡錦濤) 중심의 4세대 지도부가 들어선 뒤에는 "이제 북한에 대해 할 말은 해도 좋다"는 수준으로까지 변했다.

당이 늘 민감하게 취급하는 역사 해석 부분에도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이론 기지이자 당정 고위간부 재교육센터로 당성(黨性)이 가장 짙은 인민대학(人民大學)의 스인훙(時殷弘)교수는 지난 7월 28일 "중국의 한국 전쟁 참전은 명백한 착오"라고 주장했다.

매체 종합 인터넷 사이트인 첸룽(千龍)의 대담 프로에 나온 時교수는 "참전해 경제가 크게 악화됐고 미국과 격렬히 대치함으로써 대만 통일의 기회를 놓쳤다"며 "중국은 매우 귀찮은 이웃을 얻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은 북침 때문'이라고 하는 공산당의 기존 입장을 정면으로 공격한 時교수는 "북한 핵 문제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중국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관변 학자 時교수의 이 같은 주장은 얼마 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중국 내 대북 인식의 최신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게 베이징(北京) 외교가의 한결 같은 반응이다.

북.중 관계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중국이 북한을 예전과 달리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정설"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아직 정책 표면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경제 건설에 매진하는 중국에 북한은 이제 혈맹은커녕 '귀찮고 성가신 이웃'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정부 전반에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중국의 목표가 경제발전을 통한 국가건설에 집약된 점▶92년 한.중 수교 이후 달라진 중국의 한반도 시각▶중국의 대미 관계가 친선.우호로 치닫고 있는 점 등을 꼽고 있다.

북한 핵에 대한 중국의 인식도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북핵 문제에 관한 중국의 원칙적 입장은 '비(非) 핵화'다. 한반도 평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중국의 지역 현안이며, 따라서 동북아 평화구도를 깨뜨릴 북한 핵 출현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적 입장은 공식 표현에 불과하다. 중국 정부 일각에서는 관변 학자들을 중심으로 "북한의 위험한 행동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요즘 중국 외교라인에서는 북한이 핵보유를 선언할 경우 '제거해야 할 것'이라는 강경한 태도가 감지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미국과 공조해 경제 압박에 동참할 수도 있고, 나아가 다소 물리적인 힘을 동원해서라도 북핵 제거에 나설 수도 있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대북지원은 지난 10년간 꾸준히 줄어 왔다. 공식 지원을 제외한 '플러스 알파'는 현격하게 줄어드는 게 요즘 북.중 관계의 현실"이라고 한 전문가는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변화가 정책 변화로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한 전문가는 "현재로선 북한을 계속 달래고 설득해 평화적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돌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중국의 대북정책도 극단적 변화를 보이진 않으리라는 것이 일반적 전망이다.

항구적 평화가 어려우면 차선책이나마 현상유지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북.중 동맹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개혁.개방을 통한 중국의 세계화가 더욱 깊어짐에 따라 도전의 파랑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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