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본 등 무역정책 도입하자"|미국서 대두되는 새로운 보호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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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레이건」미국대통령이 의회가 마련한 종합무역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직후 미국에선 지금까지 서구경제학의 교리처럼 받들어져 온 자유무역주의를 버리고 일본·한국·대만의 무역 및 산업정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이 전세계적으로 자유무역주의와 시장공개를 확산시키려는 입장이었다면 최근의 주장은 이 같은 성취될 수 없는 이상만을 계속 추구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 아예 일본 등 아시아국가들의 실리적 무역정책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를 주장하는 세력은 아직 소수이지만 「레이건」의 무역법안 거부 후 새 무역법안을 마련할 미행정부와 의회에 적잖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논리의 주창자들은 자유무역주의와 시장공개정책이 서구적인 개념으로 중앙집권적이고 보호주의적 경제체제를 갖고 있는 일본이나 아시아국가들에는 맞지 않아 이 원칙을 이들 국가에 강조하며 불공정무역시정을 요구해 봤자 소용없다고 전제한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진정한 자유무역은 있어 본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완벽하게 성취될 수 없을 것이며, 미국과 서구만이 자유무역주의를 세계경제성장의 유용한 가치로 떠받들며 이를 확산시키려 해 보았자 자신들만 손해를 보게 된다는 시각이다. 이것이 지난 수년간 미국과 서구가 경험한 교훈이라는 것이다.
「레이건」행정부에서 무역관리를 지내고 최근『무역현장 미국은 어떻게 일본에 선두자리를 뺏겼는가』라는 책을 쓴「클라이드·프레스토윗츠」는 이 같은 아시아국들의 무역정책으로 ▲기업들에 대한 수출독려와 지원 ▲유망산업의 집중지원과 취약산업보호(관세·쿼터 제·외국상품판매망 규제 등을 통한) ▲일정비율의 수출의무화 ▲외국기업의 국내시장접근규제 등을 든다.
한마디로「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대응이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는 일본이 무역협상에서 주기적인 양보를 하고 있지만 일본의 GNP 중 공산품 수입비율은 60년 1·5%에서 80년 1·6%로 증가한데 그친 반면 미국은 같은 기간 1%에서 4·4%로 늘어난 점을 지적한다.
MIT의 경제학자인「폴·크루크만」은 산업 정책적 측면에서 자유무역과 시장공개원칙의 포기를 주장한다. 항공과 컴퓨터 등 막대한 자본과 기술이 요구되는 산업은 선 참 자가 규모의 경제 때문에 세계경쟁에서 우위를 지속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들 산업의 발전을 기업에만 맡겨 둘 것이 아니라 정부가 보조금지급 등 정책적 지원을 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컨소시엄을 형성, 성장시킨 에어버스가 미국의 보잉사를 위협하고 있음을 그 예로 든다.
그는 국제무역에서 자유경쟁과 자유무역주의를「낡은 이론」으로 규정하고 인위적인 전문화로 경쟁력을 키우는「새 이론」을 제창하고 나섰다.
자유무역주의라는 낡은 이론을 청산하고 아시아적 보호주의라는 새 무역정책을 주장하는 이들은「레이건」이 무역조항 때문이 아니라 공장폐쇄 시 60일전 통고조항 때문에 종합무역법안을 거부했음을 상기시키며 새로 마련될 무역법안은 자유무역주의를 천명하며 보호주의적 내용을 담은 자기 기만적인 법안이 아니라「새 이론」으로 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MIT의「레스터·더로」교수나 조지타운대의「게리·허프바우어」 교수 등은 아직 많은 학자들은 자유무역주의를 선호하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미국인들은「소련보다도 무역경쟁국들이 더 위협적」이라는 인식의 변화를 보였고 행정부 일각에선 피곤한 개별품목별 소매상식 무역협상보다는 도매상식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해야 한다는 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새로운 무역법안의 입법과정에서 이 같은 소리들과 아예 자유무역주의를 포기하자는 주장이 어떤 상호작용을 할지 알 수 없다.
더구나 보호주의 무역법안을 추진했고「레이건」의 거부권행사를 맹렬히 비난해 온 민주당이 11월 대통령과 의회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이 같은 소리는 더 큰 힘을 얻을 것이다.
이 경우 18세기 경제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져 온「애덤·스미스」에 의해 정의된 이래 2세기동안 서구의 신성한 경제적 교리로 받들어져 온 자유무역주의는 그 생명의 빛이 얼마쯤 바랠지도 모른다. <박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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