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금융실명제 굴욕 … ‘전문가 함정’에 빠진 금융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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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한애란 경제부 기자

한애란 경제부 기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부과하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정치권·시민단체와의 공박에서 금융위원회가 참패했다. ‘1993년 8월 이후 개설된 차명계좌에도 과징금을 부과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지난 5일 금융위 발표는 사실상 항복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처음 문제가 제기된 지 5개월 만이다. 금융위로선 ‘금융실명제 굴욕’이라 할만하다.

실소유주가 아닌 다른 사람이 실명확인을 거쳐 만든 차명계좌는 금융실명법에 따른 과징금 부과 대상인가 아닌가. 쟁점은 이것이었다.

초반에 금융위는 자신만만했다. 이 회장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부과하라는 국회의원 주장을 ‘법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쯤으로 치부했다. 그 근거는 대법원 판례였다. 대법원 판결은 과징금 대상이 아니라는 쪽이 2건, 과징금 부과 대상이라는 결론이 1건으로 엇갈렸다. 금융위는 이 1건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라며 무시했다.

지난해 12월, 금융행정혁신위원회가 과징금 부과를 권고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수용 거부 입장을 밝히며 정면 대응했다. 이어 1월 2일 금융위는 이와 관련한 법령해석을 법제처에 요청했다. 겉으론 한발 물러선 듯했지만 속내는 딴판이었다. 당시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일관되게 해석했고, 상대편은 그걸 알면서도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니까 계속 지적한다”라며 “금융위 해석이 맞다고 확신한다. 법제처 법령해석이 나오면 정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달 12일 나온 법제처 법령해석은 금융위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제야 금융위는 허둥지둥 태스크포스를 꾸리고 실태조사에 나섰다. 과징금 부과 시한(10년)을 겨우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금융위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고집을 부렸던 것일까. 일부에서 지적하듯이 ‘삼성 봐주기’는 아니었으리라 본다. 금융위 관계자들은 다들 당당했고 잘못한 게 없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 확신이 문제였다. 금융실명법에 대해 금융위보다 잘 아는 데가 어디 있겠느냐는 무오류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문가의 함정에 빠져 ‘왜 금융실명법이 제정됐는가’라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채 법 논리만 따지기 급급했다.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는 굳어진 화석이어선 안 된다. 작은 비판에도 아파하고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금융실명제 굴욕이 금융위 조직의 기억에 오래 남았으면 한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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