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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철강 관세 호주는 제외” … 한국은 불리한 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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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철강·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기 앞서 연설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철강·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기 앞서 연설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전쟁을 선포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상치 못했던 ‘한 수’를 들고 나왔다. 철강(25%)과 알루미늄(10%)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대상에서 호주를 제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캐나다와 멕시코에 이어 3번째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호주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관계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무역전쟁 확전 시사, 강온 양면 전술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말콤 턴불 호주 총리와 대화했다”라며 “그는 매우 공정하고 상호 혜택이 되는 군사·무역 관계를 추진해 왔다”고 언급했다. 이어 “안보협정이 매우 신속하게 진전되고 있어서 우리의 동맹국이며 위대한 국가인 호주에 철강과 알루미늄 관세를 부과할 필요가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미국, 호주와 교역에서 꾸준한 흑자

처음부터 트럼프의 입장에서 호주는 손을 봐줘야 할 나라가 아니었다. 미국의 철강 수입에서 호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전체 철강 수입(3447만t)에서 호주의 비중(28만t)은 0.8%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호주와 교역에서 꾸준히 흑자를 내고 있다. 호주에 대한 미국의 상품수지 흑자(수출-수입)는 지난해 145억5000만 달러였다. 전년(126억5000만 달러)보다 15% 늘었다.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오는 23일부터 효력이 생긴다. 이때까지 협상 가능성을 열어 뒀다. 트럼프로선 호주가 일종의 ‘시범 케이스’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 대해 ‘호주처럼 철강 관세를 면제해 줄 수 있다. 원하면 미국에 잘 보여라’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협상의 고수’다운 절묘한 카드를 내민 것이다.

일본과 유럽연합(EU)에는 강력한 ‘견제구’를 던졌다.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일본의 아베 총리와 대화했다”며 “현재 1000억 달러의 막대한 무역 적자는 공정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라고 강조했다. 사실 트럼프가 언급한 ‘1000억 달러’는 틀린 숫자다.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지난해 일본에 대한 미국의 상품수지 적자는 688억5000만 달러였다. 전년(688억1000만 달러)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일본에 1000억 달러 적자” … 통계도 틀려

트럼프에게 숫자가 맞고, 틀리고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철강을 직접 언급하지도 않았다. 대신 시장 개방과 관세를 연계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미국과 보다 나은 무역을 향한 일본의 개방을 (아베 총리와) 논의했다”라고 전했다.

EU에 대해선 한 발 더 나갔다. 트럼프는 “무역에서 미국을 고약하게 대하는 훌륭한 나라들”이라고 비꼬았다. 이어 “만일 EU가 미국 제품에 대한 끔찍한 장벽과 관세를 낮춘다면 우리도 같이 낮출 것”이라며 “그렇지 않다면 자동차 등에 세금을 매길 것”이라고 말했다.

EU의 지난해 대미 철강 수출은 501만t에 달했다. 28개 회원국이 단일 경제권이란 점을 고려하면 캐나다(568만t) 다음으로 큰 규모다. 트럼프가 예민하게 보는 EU의 대미 상품수지 흑자는 지난해 1514억 달러로 전년(1468억 달러)보다 소폭 늘었다.

무역전쟁이 자동차 등으로 확산되는 것은 EU는 물론 한국도 두려워하는 시나리오다. 자동차는 반도체와 함께 한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 품목으로 꼽힌다.

트럼프는 한국을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은 호주와 같은 관세 면제를 희망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전망이다. 지난해 미국이 한국에서 수입한 철강(340만t)은 호주의 12배 수준이었다.

호주와 달리 미국은 한국과 교역에서 적자를 내고 있다. 지난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상품수지 적자는 229억 달러였다. 전년(276억 달러)보다 줄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많다는 입장이다. 트럼프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압박하는 이유다.

무역전쟁의 핵심 타깃이 중국이란 점도 한국에는 불리한 요인이다. 미국은 중국이 다른 나라를 경유한 ‘우회 수출’로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한국은 중국산 철강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다.

한국으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다. 미 상무부는 232조 관련 보고서에서 수출 증가율을 2011년과 비교해 계산했다. 하지만 비교 시점을 2014년으로 바꾸면 한국의 대미 철강 수출은 31.5% 감소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1일 스티브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에 서한을 보내 “미국의 수입철강 관세부과 결정에 우려를 표명한다”며 “양국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감안해 한국산 철강을 관세부과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동연 "한국산 철강 제외 요청” 서한

미국이 제기하는 중국산 환적 문제도 사실이 아니라는 게 한국 정부의 입장이다. 강성천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는 “한국의 대미 수출 철강 중 중국산 소재를 가공한 비중은 2.4%밖에 안 된다”며 “우리가 수입하는 중국산 철강 제품은 대부분 저가용이고, 미국에 수출하는 건 자동차 등에 쓰는 고급 제품”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논리가 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약 한 달 동안 로스 장관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무역대표부(USTR) 대표,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사임) 등을 만났다. 김 본부장은 11일 귀국 후 청와대와 부처 간 협의를 통해 협상 전략을 정비할 계획이다.

정인교 인하대 대외부총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워낙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어 실무협상만으론 한계가 있다”며 “4~5월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 한미 간 외교·안보라인이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만큼 이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주정완·장원석 기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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