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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평짜리 '독방'서 북한방송 청취 3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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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통일부 정보분석국 수신실에서 북한방송을 듣고 있는 송기영씨.

스웨리예.오슈방찜.뿌찐 같은 이상한 단어가 친숙한 사람이 있다. 보통 사람은 상상력을 모두 동원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말을 우리식 표현으로 척척 풀어내는 재주를 가진 송기영(54)씨. 통일부 정보분석국에 근무하는 송씨는 북한방송만 30년 동안 들어온 사람이다. 스웨리예는 스웨덴, 오슈방찜은 아우슈비츠수용소, 뿌찐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식 표현이다. 송씨는 "분단 60년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할 정도로 남북한 언어 이질화가 심각한 수준"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평양방송과 중앙방송 등 북한 라디오 방송을 24시간 체크해 대북 정보분석의 기본 자료를 제공하는 일을 맡고 있다. 2~3개 방송을 동시에 청취하면서도 주요 보도가 나오거나 특이한 대목이 언급되면 즉각 알아내 보고하거나 녹취록을 작성해야 한다. 송씨는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방송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젠 웬만해선 놓치지 않는다"며 "이 일을 30년쯤 하고 나니 귀가 뚫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베테랑인 그에게도 아찔했던 실수는 있었다. 초년병 시절 구형 녹음기에 사용되던 릴 테이프를 바꿔 끼우려는 순간 방송된 중요한 내용을 녹음하지 못해 장관 보고에 차질이 생기는 등 통일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70년대까지 일제 진공관 단파 라디오로 방송을 들어야 했지만 이제는 첨단 디지털 장비가 갖춰져 실수를 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감도가 낮은 방송을 하루종일 듣느라 생긴 난청현상이란 직업병도 이젠 걱정없게 됐다고 한다.

송씨의 기억에 가장 남는 건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의 사망보도. 특별방송 예고가 나와 주요 대남제안 정도로 생각했는데 곧이어 부고가 흘러나왔고, 한달 정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상근무를 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 방송의 대형 오보사태도 기억하고 있다. 96년 7월 평양방송의 여자 아나운서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혼동해 "위대한 김정일 동지가 서거한 지 2주년이 됐다"고 방송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 그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다시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일하는 곳은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4층 수신실. 통제구역이란 붉은 경고문이 붙어있고 보안장치와 비밀자료가 가득한 2평 남짓의 공간이다. 벽에 걸린 달력에 3.1절 휴일이 없고 대신 3.8 국제부녀절이 빨갛게 표시돼있다. 송씨는 "여기선 모든 걸 북한식대로 해야 일이 된다"며 "이젠 남한 방송보다 북한방송과 찬양노래가 더 익숙하다"며 웃었다. 서울 한복판인 이곳에서 평양방송이 깨끗하게 들리는 비결은 뭘까. 청사 옥상의 단파수신용 초대형 안테나 외에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 테지만 송씨는 "그건 영업비밀"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고향인 전북 전주에서 학업을 마친 송씨는 75년11월 당시 국토통일원에 근무하던 형 기화(59)씨의 소개로 북한방송 수신사 일을 시작했다. 그는 전문분야에서 꿋꿋이 외길을 걸어온 공을 인정받아 며칠 전 5급(사무관)으로 승진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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