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학가 「열사」추모사업 활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대통령직선·소선거구제국회의원선거등 정치제도가 일단 유신이전의 상태로 환원되고 여소야대국회구성에 따라 이른바「민주화」가 궤도에 올라서면서 대학가에선 그동안의 「군부독재」체제에 항거하다 숨진 「민주열사」학생들의 추모사업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서울대에선 최근 조성만군사건을 계기로 70년대이후 민주화투쟁에서 희생된 14명 「열사」들을 대상으로 유고집발간·추모관·추모비건립등이 추진되고 있다. 이를위해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들은 6월중 「14인 열사추모사업회」를 따로 구성해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확정하고 추진에 나설 움직임이다.
이들 대학가의 「열사」추모사업은 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결산·정리라는 성격을 띠고있다.
학생들이 말하는 70년대이후 최초의 「열사」는 75년4월12일 농대교정(수원)에서 반전부시위도중 유신철폐등의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뒤 할복자살한 김상진군(당시26세·축산4).
나머지 13명은 모두 5공화국이후 희생자다. 그중 김태훈군(22·경제4)은 81년5월27일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의 광주1주년침묵시위도중 도서관 6층 난간에 올라가 『현정권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3번 외친뒤 투신했다. 황정하군(22·토목)은 83년11월16일 「레이건」미대통령방한을 앞두고 격렬한 반미시위가 계속될때 도서관방호망을 미리 준비한 식칼로 찢고 열람대에 밧줄을 매어 5층베란다로 내려오다 15m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경찰이 상주하다시피 했던 당시 캠퍼스엔 학생3∼4명만 모여도 감시눈총을 받는등 학내집회가 불가능했고 이때문에 건물난간·나무위등이 「단골기습시위」장소로 이용됐었다. 경찰이 학원에서 철수한 84년에 와서야 「정문싸움」으로 시위장소가 옮겨졌다.
한희철(22·기설4·83년12월11일 사망) 김용권(22·경영3·87년2월20일) 최우혁(21·서양사4·87년9월8일)군등 3명은 모두 군복무중 숨진 경우이나 학생들은 이들도 「열사」로 꼽고있다. 이는 「지도휴학-강제징집-녹화사업」등 정부의 학원대책에 대한 반발과 함께 학생들은 당국의 「자살」발표에 의심을 갖고있다. 당시에도 이들 죽음의 타살여부에 대한 논란이 국회로까지 번졌었다.
85년10월11일 충북황간의 경부선하행선 철도변 콩밭에서 숨진채 발견된 우종원군(사회복지4)과 86년6월21일 부산 송도앞바다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김성수군(지리1)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당국의 자살발표에 의문을 풀지않은채 「열사」로 넣고있다.
86년4월28일 전방입소거부시위중 서울신림4거리3층건물옥상에서 분신·투신자살한 김세진 (미생물4·자연대회장) 이재호(정치4·반전반핵 투쟁위원장)군등에 이어 같은해 5월20일 학생회관4층옥상에서 이동수군(원예1)이 「5월제」개막식도중 분신·투신한것은 잇단 「공개자살」의 충격과 함께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군사망 불과 이틀뒤엔 서울동작대교밑 한강에서 박혜정양(22·국문4)이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는 유서를 남긴채 익사체로 발견되는등 86년봄 한철에만 4명의「열사」를 냈다.
87년2월14일 숨진 박종철군(언어4) 에 대해서는 황인철변호사등을 중심으로 「박군추모사업회」가 따로 결성준비중이다.
지난15일 명동성당에서 할복자살한 「통일열사」조성만군(24·화학2)은 민주화에 대한 기성세대의 섣부른 낙관에 경종이자 기성세대에겐 민주화과업에서 기성세대가 제몫을 다함으로써 더이상 젊은 희생을 막아야한다는 또한번 자성의 계기였다.

<민병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