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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일상에서 환상 길어올린 '상상력의 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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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나니아 연대기'를 어렸을 때 접한 사람들의 체험은 대부분 비슷하다.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라는 묘한 제목의 책을 든 채 한두 쪽 넘겨본다. 그러다가 주인공 루시와 함께 옷장 속으로 들어간다(어린 독자들 중 여럿은 이 책을 읽기 전에 벌써 옷장 속을 한두 번쯤 파고들어 본 경험이 있다. 아늑한 옷장 안은 어머니의 뱃속 같은 느낌일까?). 가로등이 서 있는 눈 덮인 황야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파우누스(상반신은 사람이며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한 숲의 정령)를 만날 때쯤이면, 어린 독자들은 이미 나니아의 세계에 매료돼 있다.

성스러운 사자 아슬란이 인간과 말하는 동물의 세계로 창조한 나라, 그후 2555년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진 가상의 나라 나니아. 이 나라의 이야기를 그린 '나니아 연대기' 7부작은 출간 직후부터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고, 출간 후 50년이 넘도록 상상력 풍부한 어린이들의 벗이 돼왔다. 과연 이 책을 쓴 사람은 누구이며, 그는 왜 '나니아 나라'를 창조했을까?

저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흔히 C S 루이스라고 쓴다)는 1898년 11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책이 가득한 집에서 말하는 동물과 기사 이야기를 읽으며 자랐다.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아동을 학대하는 기숙학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옥스퍼드대에 입학해 그리스어.라틴어.고전철학.영어영문학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옥스퍼드대 특별연구원이 됐다.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쓰게 된 경위에서 뺄 수 없는 것은 '반지의 제왕'의 저자 J R R 톨킨과의 우정이다. 그들은 동료(옥스퍼드대 영어학부 교수)로 처음 알게돼 서로의 글을 비평하고 신화와 철학을 주제로 토론하며 평생에 걸친 우정을 쌓았다. 무신론자였던 루이스는 1931년 기독교 신앙으로 귀의하는데, 여기에는 톨킨의 설득이 큰 역할을 한다. 독신의 고전영어 교수가 49년 어린이를 위한 팬터지 동화 '나니아 연대기'를 쓰게 된 데에도 20여년에 걸친 톨킨과의 우정과 교유가 큰 힘이 됐을 것이다(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톨킨은 '나니아 연대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의 산타클로스, 그리스의 님프와 사티로스, 박쿠스, 노르웨이의 난쟁이와 거인 등 서로 다른 신화적 전통에 속하는 인물들이 함께 어울려 자유로이 돌아다닌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나니아 연대기'를 흠잡는 사람들이나 칭찬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 책이 갖는 강력한 기독교적 함의다. 루이스도 인정하고 있듯이 7부작 중 '마법사의 조카'는 천지 창조 이야기와 악(惡)이 나니아에 숨어들어온 이야기를,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캐스피언 왕자'와 '말과 소년'은 기독교에 대한 귀의를 보여준다. '새벽 출정호의 항해'는 영적인 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모험을, '은의자'는 어둠의 세력과 벌이는 끊임없는 전쟁을 예시한다. '마지막 전투'는 적(敵)그리스도의 도래와 함께 오는 세계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다. '나니아 연대기'는 성서와 상응하는 나니아의 창세기로 시작해 묵시록적 종말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동화화'라는 것만으로 이 책이 지금까지 수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매력은 오히려 성서의 해석과 아울러 기독교에 한정되지 않은 여러 가지 신화 속의 인물과 중세적 전통, 말하는 동물들이 누리는 삶의 기쁨, '나니아의 예수'인 위험하고도 선하고 아름다운 사자 아슬란, 옷장.기차역이나 벽에 걸린 그림처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일상적인 물건 속에 또 다른 나라로 가는 길이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진 결과다. 특히 마법의 나라로 통하는 문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믿음은 너무도 강력하고 생생해서, '나니아 연대기'를 읽은 많은 아이들은 옷장 속에서 몇 시간 동안 나니아로 가는 길을 찾곤 했다. 해리 포터가 킹스 크로스 역 9 ¾ 승강장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떠날 때, 아이들은 50년 전 학교로 돌아가는 기차역에서 마법을 통해 나니아로 불려들어간 페번시가(家) 아이들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송경아<소설가>

깊이 읽고 싶다면 …

'나니아 연대기'는 '반지의 제왕'처럼 물샐 틈 없이 꽉 짜인 이야기가 아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아이디어가 활달하고 창조적인 만큼 집필도 즉흥적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작가 루이스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까지 담당 편집자를 만나 이야기의 빈 곳을 메우는 문제를 상의했을까. 관련서가 많이 나오는 이유도 허술한 듯 하면서도 다양한 함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니아 연대기'를 한 번 정도 읽고 나니아가 어떤 나라인지 한 눈에 보고 싶은 독자에게는 '나니아 연대기 가이드북'(마사 새몬스, 루비박스)과 '나니아 연대기 해설집'(콜린 듀리에즈, 규장)이 도움이 될 것이다. 각 권의 줄거리를 비롯해 나니아의 역사.지리, '나니아 연대기'의 신화적 상징을 정리해주고 있다.

'나니아 연대기'의 주제를 권별로 탐구하려는 독자는 '나니아 가는 길'(피터 J 섀클, 베이스캠프)이 좋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 아슬란과 바커스.파우누스 등의 이교도적 상징이 빚어내는 부조화를 눈여겨 본 독자라면 'C.S. 루이스와 나니아 나라 이야기'(데이비드 다우닝, 지식과사랑사)도 일독할 만하다.

혹 팬터지를 받아들이기엔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다시 찾아간 나니아'(샤나 코히 엮음, 랜덤하우스중앙)를 읽으면 어떨까. 신학과 문학 비평에서부터 '진보적 페미니스트이며 불가지론자인 내가 나니아를 사랑하는 이유'같이 미시정치적인 측면까지 두루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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